[소그룹] 508호 - 랍비와 한 상에 앉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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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들에게 손 대접은 성스러운 의무로 여겨졌습니다. 성경에 나온 초기의 손 대접 사례는 아브라함이 생전 처음 보는 세 나그네를 대접하려고 즉각 살찐 송아지를 잡고 푸짐한 식사를 차린 것입니다. 예수님도 손 대접에 문외한이 아니셨습니다. 예수님은 저녁 초대를 거절하거나 잔치에 걸맞지 않은 옷차림을 하거나 식탁에서 엉뚱한 자리에 앉은 손님 등 잔칫상과 관련된 비유를 많이 들려주셨습니다. 생각해보면 예수님이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 역시 죽기 전날 밤 제자들과 함께한 식사자리에서였습니다.

고대의 손 대접

이스라엘에 가보면 고대 땅에서 손 대접은 종종 죽고 사는 문제였음을 단박에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늘에서도 섭씨 32도인 무더위, 그늘도 없고 앙상한 덤불만 있는 돌밭 풍경이 끝도 없이 이어집니다. 설상가상으로 그 길에는 취약한 여행객 갈취가 생업인 강도들이 심심치 않게 출몰하는 곳입니다. 그런데 이런 척박한 나라에서 여행객이 기댈 곳이 하나 있으니, 바로 손 대접 문화입니다.
이들에게 ‘식탁’은 단지 먹는 장소 이상입니다. 식탁은 상호 신뢰의 장소이자 연약함을 털어놓는 곳입니다. 누군가와 겸상한다는 것은 그들과 보호받는 관계를 공유함을 뜻했습니다. 어떤 가족의 식탁에 손님으로 왔다는 것은 그들의 보호 아래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 가족과 함께 있는 동안에 주인은 자기 목숨을 희생해서라도 손님을 보호했고, 이는 주인의 명예가 걸린 문제였습니다.

하나님과 저녁 식사하기

하나님과 식탁에서 교제한다는 발상은 성전 제사 제도의 핵심이었습니다. 죄와 죄책을 위한 속죄제 같은 제물은 남김없이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그러나 화목제(쉐렘 shelem)의 제물은 달랐습니다. 이런 유의 희생제물은 그 일부분을 예배자와 가족이 제사장과 더불어 나눠 먹었습니다. 그들이 제단에서 먹는 것은 마치 하나님이 ‘자신의’ 음식을 그들과 나눠 드시는 듯한 모양새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식탁에서 식사하는 것과 진배없었습니다. 화목제 제물을 통해 그들은 하나님과 서로 간의 샬롬을 축하했고, 이스라엘 백성은 이것이 진정한 언약 교제임을 알았습니다. 이 식사는 당신과 하나님 사이에, 그리고 당신과 함께한 모든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평화 상태를 상징했습니다.
하나님은 식탁 교제를 단지 성전에 국한하지 않으셨습니다. 가정에서도 비슷한 의미로 식탁 교제가 이루어졌습니다. 전통적 유대 가정에서는 지금도 저녁 식탁은 가족 제단으로 여겨 가정 자체를 하나님이 거하실 작은 성소라는 뜻으로 ‘미크다쉬 메야트’mikdash meyat라고 부릅니다. 이 개념을 우리가 속한 소그룹에도 적용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샤바트 저녁식사

오늘날 우리는 식사 시간을 단순히 육신의 필요를 재충전하는 기회로만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빨리빨리’ 사회에서 많은 이들은 혼자 식사하거나 무언가 다른 일을 하면서 식사합니다. 우리는 음식 공동체 사이에 몇백 년간 존재해온 긴밀한 끈을 상실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율법을 지키는 유대인 가정에선 금요일 오전은 집 안 청소와 요리로 바삐 돌아갑니다. 금요일 일몰 때 가족이 저녁 식탁에 착석하는 것과 동시에 모든 일이 끝납니다. 금요일에 할 수 있는 마지막 ‘일’은 저녁식사를 시작하기 위해 양초에 불을 붙이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빵을 여러 조각으로 나누어 식탁으로 돌리고, 아내와 자녀를 축복하며 성경을 각론합니다. 양초는 종종 스스로 꺼질 때까지 타도록 놔두었습니다. 저녁은 훌륭한 식사와 느긋한 대화를 즐길 수 있는 멋진 시간이 됩니다. 우리의 소그룹도 의무적인 모임이 아니라, 말씀과 교제와 쉼이 어우러진 특별한 시간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화해의 식탁

용서와 평화의 징표로 함께 식사하는 관습은 구약부터 신약에 걸쳐 면면히 이어져왔습니다. 탕자를 집으로 환대한 아버지가 아들의 귀가를 축하하고자 당장 큰 잔치를 베푼 것을 기억하십니까? 이는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화해를 기리는 축하 식사 풍경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다시 가족의 일원이 되었기에 띨 듯이 기뻤습니다.
예수님의 스토리는 우리의 죄가 일련의 법규 위반이 아니라 사랑이 풍성하신 아버지, 하나님에 대한 참담한 거역임을 분명히 알려줍니다. 우리는 아버지를 저버리고 조상의 땅을 판 후 상속재산을 탕진해버린 탕자와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도 주어진 좋은 선물(시간, 돈, 재능 등)을 취하여 제 멋대로 인생을 살고자 하나님을 떠납니다.
돌아온 탕자에 대한 예수님의 비유는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파격적으로 큰지 드러냅니다. 아울러 이 이야기는 구원에는 단지 천국에서의 삶만이 아닌 지상에서 하나님과 우리가 나누는 차원이 있음을 부각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소외감을 고치시면서 날마다 지속적인 친밀감을 누리게 하십니다. 우리의 소그룹 역시 서로를 화해하고 용서하며 친밀감을 누리는 장이 되어야 합니다.

메시아 잔치

예수님 당대의 많은 유대교 종파는 이방인들과는 절대 식탁 교제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초대교회는 예수님의 본을 따라 정반대의 자세를 취해, 유대인과 이방인 신자가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식사했습니다. 이는 이해 불가한 은혜와 사랑의 징표였습니다.
우리가 속한 공동체에는 서로 다른 모양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의 상식으로 이해가 어려운 사람이 있을 수 있고, 때로는 나를 화나게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을 입은 자로서, 우리는 그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용납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소그룹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타날 수 있길 바랍니다.

※이 글은 『 랍비 예수, 제자도를 말하다 』로이스 티어베르그ㆍ앤 스팽글러 공저, 국제제자훈련원) 중 일부를 발췌, 각색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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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소개

랍비 예수

이 책을 읽으며 우리는 비로소 랍비의 발치에 앉아 토라의 말씀을 듣는다. 그리고 랍비 예수와 대화하며 삶 의 뜨락에서 행복한 훈련을 전수받는다. 진지한 성경 읽기, 제자훈련의 새로운 차원을 모색하는 이들은 이 책을 반드시 읽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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