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그룹 사역은 소수의 헌신적인 제자를 길러 그들과 함께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이에 집중하지 않는다면 사역자는 사람을 끌어 모으는 데 온 마음을 쓰게 됩니다. 늘 서두르고 우왕좌왕하고 있다면, 그의 연간 계획표가 빼곡하게 채워져 있고, 늘 모임의 인원수를 늘리는 방법을 고민하며 그것을 위한 회의를 소집하고 있다면, 그는 소그룹 사역에는 별 관심이 없는, 더 나아가서 예수님을 따르는 헌신적인 제자를 기르는 데에는 별 효과가 없는 데에 시간과 노력을 들이는 사역자입니다. 물론 그는 “사람이 중요하니까 사람 수를 세는 것이다”라고 자신을 정당화하겠지만 말입니다.
넉넉한 시간, 특히 침묵과 고독으로 이뤄진 시간이 없다면, 그것을 통해 하나님과 교제하는 기회를 갖지 않는다면 진정한 영적 변화를 일으키기는 쉽지 않습니다. “빨리 빨리” 속에서, 꽉 짜인 행사와 모임과 사역 중에서 하나님을 발견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속성으로 사람을 많이 변화시키려는 유혹을 버리지 못한다면 소그룹으로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 각 사람에게 관심을 가질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많은 평신도들이 목회자를 만나면 “요즘 많이 바쁘시죠?”라고 말하며 인사말을 꺼내고 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말하는 이유는 그만큼 목회자들이 바빠 보이기 때문이며, 또 목회자라면 바쁘게 마련이며 바쁜 목사가 능력 있는 좋은 목사라는 생각이 은연중에 퍼져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목회자가 바쁜 일정에 쫓기는 이유는 그가 예수님의 마음을 소유하지 못했기 때문일 수 있다는 생각은 잘 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군중을 믿지 않으셨고, 대중 운동을 통해서는 영원한 결과를 낳을 수 없음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바쁜 목회자는 군중의 호감을 얻고 싶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고자 합니다. 그리고 이는 인기를 얻으면 사람들을 즉시 움직일 수 있는 힘을 얻고자 하는 권력욕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단, 바쁜 목회자라고 해서 이런 불순한 야망으로만 똘똘 뭉친 사람은 절대로 아닙니다. 그들도 예수님처럼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진정한 필요를 깨닫게 하고, 예수님을 친밀하게 느낄 수 있도록 하기 원합니다. 다만 자신이 이런 사역에 알맞은 자가 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지도 편달을 달게 받고 오랜 시간에 걸친 도제 교육을 받아야 함을 인정하지 못할 뿐입니다. 그리고 바쁜 목회자는 자기 눈앞에 보이는 군중 가운데 실제로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님의 길을 따르려 하는 자는 소수에 불과하다는 사실도 인정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도 제대로 성숙하지 못한 상황에서 대중들을 향해 그들의 입맛에 맞을만한 가르침과 그들이 바라는 대답을 주며 그들을 이끌려 하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사역자는 결코 속성으로 사역자로 세워져 빠른 시간에 많은 사람을 끌어 모으려는 유혹에 빠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얼마든지 몇 만 명쯤 쉽게 모으시고 그 청중을 휘어잡을 능력을 갖고 계셨을 뿐 아니라 기적을 일으켜 군중들로 하여금 열광하게 하실 수도 있으셨지만 오직 소수의 헌신된 제자를 기르는데 총력을 기울이셨습니다. 교인 증가, 건물 증축, 헌금 증가, 프로그램 증가로 이어지는 소위 ‘성공’이 반드시 하늘로부터 온 축복이 아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의 일에 게으르지 않고 최선을 다하는 삶이란 수많은 사역으로 바쁘게 뛰어 큰 “가시적 성과”를 내는 것이 아니라 마치 부모가 자녀들을 바르게 양육하기 위해 최선을 다함과 같은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소그룹 사역에 집중하여 각 사람을 살피는 이유입니다. 당장 성과를 내야 할 것 같은 조급함을 버리고 느긋한 마음으로 내게 주어진 각 사람에게 집중하는 것이야말로 예수님의 길을 따르는 사역입니다.
※ 이 글은 『느긋한 제자』 (앨런 패들링 저, 국제제자훈련원 간)의 일부 내용을 발췌하여 각색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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