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를 바르게 이끌기 위해서는 목사와 교인들이 서로를 제자 삼아야 합니다. 그리고 제자도는 서로의 삶을 빚어가고 교정하는 수많은 사랑과 권징의 행위를 통해 생겨납니다. 소그룹이 매주 모여 함께 말씀을 묵상하는 것은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었음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성립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소그룹을 통해 각자가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빚어져 가기를 기대합니다. 이는 곧 삶의 “변화”를 추구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변화를 일으키는” 제자도에는 권징, 즉 판단과 교정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문제는 오늘날 교회에서는 권징이 사라지고 있기 때문에 결국 제자도마저 흐려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인간의 죄성에 굴복하는 일이며, 세속화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죄인들은 판단 받는 것을 싫어할 뿐 아니라, 포스트모더니즘과 다원주의로 물든 세상의 철학은 우리에게 어느 길이 옳은가에 대한 가르침 자체가 무의하다고 가르칩니다. 서로 권면하고 교정하는 일이 사라진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자고 모인 소그룹이 말씀을 통해 서로를 변화시키고 빚어가는 역할은 감당하지 못하고, “상호존중”만 남아 친목단체로 변질됩니다.
사실 권징을 이야기할 때 우리가 불편함을 느끼는 것은 사실입니다. 실제로 교회가 공식적으로 근신명령이나 수찬정지, 출교 등의 권징을 하게 되면 많은 사람들에게 마음의 상처를 입힙니다. 그러나 교회 내에 불법과 죄가 이뤄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해 눈감고 아무도 그것을 교정해 주려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불편함 수준을 넘어갑니다. 교회가 교회로서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영적인 타락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런데 소그룹 내에서 판단과 교정이 잘 이뤄진다면 권징이 주어졌을 때 생기는 불편함과 상처의 문제와 권징이 이뤄지지 않았을 때 생기는 영적 타락의 문제를 최소화할 수 있습니다.
물론 교회 내에 죄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가장 좋겠지만, 그것은 지상교회에서는 생각할 수 없는 일입니다. 차선은 바로 공식적인 권징까지 가기 전에 죄인들이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자주 마련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비공식적인 권징이 중요합니다. 소그룹과 같은 친밀한 관계 내에서 권징이 수시로 이뤄진다면, 그리고 소그룹에 속한 지체들이 개인적이고 사적인 충고로 이뤄지는 비공식적 권징을 받아들이는 분위기가 뿌리내린다면 당연히 공식적인 권징은 줄어들게 마련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대로, 형제가 죄를 범했을 때 개인적으로 일대일로 권고할 때 회개한다면, 또는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소그룹 환경에서) 권했을 때 그가 마음을 돌이킨다면 굳이 교회에게 말하는 공식적 권징까지는 이뤄지지 않아도 되기 때문입니다(마 18:15~17 참조).
소그룹이 지나치게 친밀한 관계만을 강조하고 그 안에서 권징이 사라진다면, 결국 그 소그룹은 서로를 변화시키는 제자도 공동체의 특성을 잃어버린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물론 권징은 마음에 부담을 줍니다. 또, 누군가 우리를 교정할 때, 그 앞에서 겸손해지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변화시키는 제자도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는 데에 꼭 필요합니다. 우리는 서로가 죄에 빠지지 않도록 권면하고 감독하는 것 역시 “사랑”에 포함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 이 글은 “당신이 오해하는 하나님의 사랑”(조너선 리먼, 국제제자훈련원)의 일부 내용을 발췌하여 각색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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