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십] 662호 - 이번 여름, 묵상을 즐기고, 묵상의 즐거움에 빠져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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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후 2014년 6월 30일

662호

이번 여름, 묵상을 즐기고, 묵상의 즐거움에 빠져보라

“당신을 기독교에 대해 그토록 부정적이게 만든 게 무엇입니까?”라는 물음에 필립 얀시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목사인 우리 아버지 교회 교인들치고 인생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을 한 명도 못 봤어요.”
기쁨을 준다고 다 참된 기독교라고 말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기쁨이 없는 기독교는 참된 기독교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셨으며”(히 12;2),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을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는 자”(고후 6:10)라고 정의했고, 느헤미야는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느 8:10)이라고 했습니다. 선교사들은 말로 다할 수 없는 고초를 겪었으면서도 형언할 수 없는 자신들 속에 있는 기쁨 때문에 “나는 한 번도 희생해 본 적이 없다”고 고백하기도 합니다.

진정한 인격적 만남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고 알고 그분께 순종하는 곳엔 기쁨이 있습니다. 반대로 기쁨의 결핍은 진정한 인격적 만남이나 참된 앎의 결핍을 드러내는 숨길 수 없는 증거들입니다. 왜곡된 열정이 낳은 극단적인 냉정, 과도한 기대가 낳은 날개 없는 절망, 집착에 가까운 인정 욕구가 낳은 파괴적인 관계 등은 참된 즐거움을 맛보지 못한 이들이 오가는 극과 극입니다.
인간의 문제는 너무 많이 기쁨을 누리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너무 적게 기쁨을 누리는 데 있습니다(C. S. 루이스, 『영광의 무게』중에서). 인간은 기뻐하고 즐거워하도록 지음받은 존재들입니다. 우리는 “보기에 심히 좋다”하신 하나님의 기쁨에 참여해야 하는 존재이고, 인간 창조는 “이는 내 뼈 중에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한 첫 사람 아담의 주체할 수 없는 탄성과 연합의 기쁨을 완성하는 일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인간과 자연이 자기 자리에서 자기 도리를 다할 때 누릴 수 있습니다. 그 도리를 다하기로 한 약조가 ‘언약’이고, 그 도리가 ‘율법’이고, 그 도리를 다하는 것이 ‘의’이며, 그 도리를 다할 때 찾아오는 것이 ‘샬롬’이자 ‘쉼’(안식)이고, 그 도리를 다한 이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웰빙(well-being)이 ‘복’입니다. 언약의 파트너들은 서로가 서로를 향해 자신을 즐기도록 내어 주어야 합니다.

영적인 적신호
우리는 너무 쉽게 만족하고 맙니다. 헛배가 불렀을 뿐인데도, 우리는 우리 자신이 이미 만족하고 있다고 너무 쉽게 설득당하고 맙니다. 묵상이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무엇을 먹고 있고, 무엇을 기대하고 있고, 무엇 때문에 웃고 있는지 묵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정말 갈망해야 할 것은 너무 적게 갈망하고, 갈망해도 얻지 못하고, 얻는다 해도 무익한 것만 갈망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추구하는 일에 있어서만큼은 절대 자족해서는 안 됩니다. 너무 적게 기뻐하는 것은 하나님을 너무 적게 경험하는 것이요, 그만큼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있어서 그것으로 기뻐하고 있는 것이니 슬퍼해야 마땅한 영적인 적신호입니다.

묵상의 즐거움
묵상을 통해 하나님을 누리는 기쁨은 이 세상에서 인내할 수 있는 힘을 주며, 하늘 가는 우리의 길 앞에 놓인 죄의 권능을 깨뜨리는 열쇠가 됩니다. 죄가 싫어지는 길 외에 죄와의 장기전에서 이길 수 있는 다른 길을 나는 알지 못합니다. 인간의 마음은 쉼 없는 욕구 제작소이고, 죄는 강력하게 그리고 자멸적으로 우리를 유혹합니다. ‘어디서 마실까’, ‘어디서 즐길까(feast)’ 묻는 질문에 우리가 대답할 수 있는 것은 묵상의 즐거움을 통해 여호와를 즐기고(feast), 공동체를 즐기고(feast), 자연을 즐기는(feast) 것뿐입니다. 이 즐거움을 맛봄으로써 궁극적인 즐거움을 사모하는 것뿐입니다.

묵상의 목적과 목표
묵상은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일이며, 그 즐거움으로 인해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게 하는 일입니다. 묵상은 하지 않으면 안되는 힘겨운 의무가 아니라 그 기쁨을 알면 하지 않을 수 없는 즐거움입니다. 그 즐거움이 우리가 다시 묵상의 여정에 나설 수 있게 하는 에너지이며, 그 즐거움의 공유가 갖은 시련과 연약함 속에서도 공동체를 하나되게 하는 힘입니다. 우리가 나뉘지 않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할 수 있는 것도 바로 이 묵상의 즐거움 때문입니다.
묵상을 통해 얻는 하나님을 아는 기쁨과 하나님의 창조 섭리를 깨닫는 기쁨, 하나님 나라의 위대한 걸음에 동참하는 기쁨, 죽은 영혼이 살아나는 말씀 사건의 증인이 되는 기쁨이야말로 거친 광야를 걷게 하는 원동력입니다. 묵상의 기쁨이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 외에 얻고 싶어하거나 기대하는 것이 없게 됩니다. 하나님 자신이 묵상의 목적(purpose)이 되게 하고 예수님과 같아지는 것이 묵상의 목표(aim)가 되게 하는 것은 바로 관계를 즐기는 데서 나오는 교제의 즐거움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리더십 네트워크 독자 여러분!
지난 상반기 하나님을 위한 일로 지치지는 않으셨습니까? 하나님을 누리기보다 하나님을 위한 사역에만 몰두하지 않았습니까? 잠시 멈춰 뒤를 돌아보십시오. 그리고 하늘을 바라보십시오. 묵상은 무언가를 이루기 위한 수단이 아닙니다. 그 자체가 목적입니다. 묵상은 하나님과의 만남이고 교제이기 때문입니다. 이번 여름, 우리 모두 묵상을 즐기고, 묵상의 즐거움에 빠져보면 어떨까요? 바라기는 9월에 우리 모두 재충된 모습으로 다시 뵙기를 원합니다.

※ 이 글은 『묵상의 여정』(성서유니온선교회)의 제 12장에서 발췌, 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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