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리더이며 또한 목회자라면 스승의 마음이 아니라 아버지의 마음으로 성도들을 양육하겠노라고 결단하는 것이 마땅합니다(고전 4:15). 그리고 아버지라면 아이에게 생선을 주기보다 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는 데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자기가 섬기는 성도들에게 성경의 말씀을 일일이 해석하고 가르치기는 하여도 그들로 하여금 직접 말씀을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을 갖도록 훈련하지는 않는 목회자가 많습니다. 그러다보니 교인들은 같은 본문을 가지고 다른 설교자가 다른 관점으로 설교하는 것을 들으면 그것을 통해 본문이 가진 풍부한 영적 양식을 깨닫기보다는 혼란을 느끼고, 목회자가 미리 일일이 가르쳐주지 않으면 주일학교 공과를 미리 준비하는 것마저도 힘들어합니다.
물론 특별한 훈련을 받지 않더라도 쉽게 사용할 수 있는 묵상용 교재나 성경공부 교재가 시중에 나와 있으니 평신도들에게 성경을 해석하는 훈련을 제공하지 않아도 충분히 성경을 묵상할 수 있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교재들은 대부분 성경본문을 읽기만 하면 쉽게 답할 수 있는 문제들을 몇 개 던진 후에 곧 “이 본문이 나에게 말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 다시 말해, “내가 이 본문을 읽을 때, 그것은 내 안에서 어떤 생각이나 느낌을 자극하는가?”라는 주관적인 형태의 질문을 던지곤 합니다. 결국 이런 교재에만 의존하는 것은 성경이 무엇을 말하든 간에 읽는 사람이 편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메시지를 찾아내는 것이 성경공부라고 생각하게 만듭니다.
이는 모든 성도들을 성경전문가로 키워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거룩한 제사장이며 중간에 개입하는 전문가가 없이도 얼마든지 하나님과 그 분의 계시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권세를 부여받았습니다. 그러나 이 권세를 가졌다고 해서 자기 주관적인 느낌으로 사도와 선지자들의 목소리를 압도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성경의 권위를 믿는다면, 그리고 이 말씀이 모든 이에게 필요하고 적합함을 믿는다면 더욱 성경을 해석하는 훈련을 받아야 하고, 또한 다른 성도들이 이런 훈련을 받도록 독려해야 합니다.
성도들을 성경해석자로 양육한다는 것은 “이 본문이 지금 나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에 관심을 갖기 전에 “이 본문이 원래 무엇을 의미했던 것인가?”에 먼저 관심을 갖게 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원래 의미”가 있기 때문에 이 본문을 내 입맛에 맞게 적용할 수 없음을 인정하는 사람을 만든다는 뜻입니다. 마치 식사시간에 자기 입맛에 맞지 않는 야채들을 하나하나 골라내는 아이들과 같이 성경 가운데 자기 입맛에 거슬리는 본문을 건너뛰거나 마음대로 적용하려는 마음을 제거한다는 뜻입니다. 이를 통해서 말씀을 통하여 일하시는 성령께서 성도들의 마음과 삶 속에서 마음껏 일하실 수 있게 모든 것을 내어드리는 성도를 만든다는 뜻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성도들을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사람들로 만드는 것이며, 하나님을 진정으로 믿는 사람으로 양육하는 길입니다.
이는 다니엘 도리아니의 <해석, 성경과 삶의 의미를 찾다>의 서론을 각색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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