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이란 인격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된 사람입니다.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는 보물 없는 보석함이요 그림 없는 액자요 호흡 없는 생명체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각자에게 오셔서 “내게 오라”고 “나를 따르라”고 개별적으로 부르십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아무리 머뭇머뭇 미약한 응답일지라도 그 부르심에 응답할 때 시작합니다. 그렇게 그분을 따르기 시작하면 우리는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관계가 다채롭게 빛나는 다면체임을 깨닫고 점점 놀라고 기뻐하게 됩니다. 존 스토트 목사는 <내 삶의 주인이신 그리스도>에서 언뜻 보면 별 의미 없어 보이는 8가지의 전치사들을 통해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를 보여주는 위대한 진리들을 명쾌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몇 가지를 함께 살펴보기 원합니다.
in - 우리의 생명이신 그리스도 안에 바울은 안드로니고와 유니아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면서 “나보다 먼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롬 16:7)”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펴보려는 단어인 ‘안에’는 예수님과 연관되어 쓰일 때는 공간적인 의미가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가족들이 건물 내부에서 함께 저녁 시간을 보내고, 행주를 찬장 속에 두고, 연장을 상자 속에 두듯이 그렇게 그리스도 ‘안쪽에’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우리가 그분의 내부에 자리하거나 안전하게 그분 안에 갇혀 있다는 뜻이 아니라 아주 친한 인격적인 관계로 그분과 연합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께서 친히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로 이를 의문의 여지없이 밝혀주셨습니다. 그분은 제자들에게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4-5)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비유로 보건대 ‘그리스도 안에’ 있고 거기 거한다는 것은 분명히 그분과 함께 살아 있는 성장의 관계를 누리는 것이다. GNB 역본이 ‘그리스도 안에’를 ‘그리스도와 연합하여’로 옮긴 것은 잘 맞는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에 필수 불가결한 것입니다. 우리가 연합을 지각하고 체험하는 방식은 서로 다를 수 있으나, 연합 자체가 없이는 아무도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어 인격적, 유기적으로 그분과 연합되어 있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엄청난 복, 즉 새 신분(우리는 그분과 바른 관계에 놓인다), 새 생명(우리는 성령으로 새로워진다), 새 공동체(우리는 하나님의 가족이다)를 주십니다.
for - 우리의 목표이신 그리스도를 향해 모든 사람의 인생에서 정말 흥미로운 점은 ‘무엇이 그를 움직이게’ 하는가이다. 빅터 프랭클 박사가 『의미요법』을 개발한 것은 아우슈비츠수용소에 있을 때였습니다. 그가 관찰한 바에 따르면, 수용소의 포로들 중 완수할 임무가 있음을 아는 사람들이 생존할 가능성이 가장 높았습니다. 그는 ”삶의 이유가 있는 사람은 거의 어떤 상황도 견뎌낼 수 있다“고 한 니체의 말을 인용한 뒤에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추구야말로 인간의 궁극적인 동인이다“라고 자신의 견해를 덧붙였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의미’란 하나님, 인간, 대의, 책임, 목표 등일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우리의 의미는 하나님입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안에 계시된 하나님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부분에서 ‘그리스도를 향해’ 살려 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이 ‘향해’ 라는 말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늘 그리스도를 앞에 모시고 항상 마음속에 눈앞에 그분을 두어야 함을 가리킵니다. 한 마디로 우리의 삶은 그분을 지향해야 합니다. 우리의 야망은 그 분을 섬기고 순종하며 기쁘시게 하는 것이며, 우리의 최고 관심사는 범사에 그분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그 분과 바른 관계는 다른 사람들과의 바른 관계로 이어집니다. 그래서 교회 가족 안에서, 일터에서, 아파하는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보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분을 주일의 교회나 성경이나 삶의 종교적인 부분으로 제한하려 해서도 안됩니다. 매순간 삶의 모든 부분에 그분을 영접해야 하며 그 속에서 그분을 발견해야 합니다. 그렇게 그리스도를 드러내기 위해서 날마다 주님의 얼굴을 구하고 기도로 내 삶과 일을 그분께 가져가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럴 때 그분의 임재가 서서히 우리 삶 전체에 배어들고 우리는 아무 때나 그분께 가서 말씀드리는 것이 자연스러워집니다. 또 그럴 때 우리는 다른 사람들 안에서 또한 배후에서 그 분을 보며, 그렇게 그분을 보면서 그분을 대하듯 대하게 될 것입니다.
like - 우리의 모본이신 그리스도처럼 그리스도를 본받는다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사도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처럼 사는(요일 2:6,GNB) 법을 배워야 한다”고 말합니다. 현대의 학자들 사이에는 신약성경에서 수십 가지 상이한 신학을 찾아내는 풍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풍조와는 반대로 위의 말씀들은 신기하게 하나로 의견이 모아집니다. 하나님의 전체적인 목표는 하나님이 우리로 그리스도를 닮게 하려하신다는 개념입니다. 영원한 예정과 최초의 회심과 지속적인 성화와 최후의 영화 가운데 무엇을 생각하든 부각되는 주제는 동일합니다. 각 단계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음’ 혹은 그 분의 ‘형상’이 언급됩니다. 완성된 구원이란 바로 그분과 같아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처럼 되기 원한다면 그 일은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을까요? 기독교의 거룩한 길은 우리가 예수님처럼 살려고 발버둥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성령을 통해 우리 안에 오셔서 사시는 것입니다. 요컨대 비밀은 ‘모방’(그리스도인 그리스도의 삶을 모방함)이 아니라 ‘재생산’(그리스도가 우리를 통해 자신의 삶을 재생산하심)입니다. 우리는 성령의 조명을 통해 예수님의 영광을 볼 뿐만 아니라 성령의 내주하시는 능력을 통해 예수님의 형상으로 변화되어가고 있습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계시하시고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실 것입니다. 그래야만 우리는 부족하나마 그분의 영광을 위해 그토록 소원하는 바인 그리스도 중심의, 그리스도를 닮은 그리스도인의 모습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언뜻 보면 별 의미 없어 보이는 단어들을 통해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를 보여주는 위대한 진리들을 명쾌하게 짚어보았습니다. 결론적으로 그리스도가 중심에 계시면 병든 교회는 속히 건강을 되찾을 것이고 병든 그리스도인들이 활력을 되찾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초점을 그리스도께 두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는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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