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의 시각 vs 발코니의 시각
믿음이 있는 우리들에게도 고난은 어려운 문제입니다. 급기야 고난이 선하신 하나님을 의심하게 만들어버리기도 하지요. 그러나, 우리들 모두가 간과하는 비밀 한 가지는 "고난이 중립적"이라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고난을 어떻게 이해하며, 고난이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느냐 하는 것입니다. 앨리스터 맥그래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고난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는 성도에게 달려 있다." 즉, 고난이 믿음을 갈고 닦는 계기가 되기도 하고,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생 길 위에 있다.
프린스턴 신학대학원 학장이었던 존 맥케이(John Mackey)의 책 『기독교 신학 서론』(Preface to Christian Theology)의 2장은 "두 가지 관점: 발코니와 길"이라는 제목을 갖고 있습니다. 이 장에서 매케이는 구경꾼의 관점과 참여자의 관점, 발코니 위에서 길을 내려다보는 관점과 길을 가면서 주변을 보는 관점을 비교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네 인생길에는 늘 실제적인 문제들이 도전해옵니다. 그리고 일상적으로 선택의 문제에 직면합니다. 어느 길로 가야 할까? 그 길은 어디로 나 있을까? 안전할까? 저 모퉁이를 돌아가면, 혹은 저 산언덕을 넘어가면 무엇이 있을까? 늘 이런 의문에 부딪힙니다. 비록 길 위의 인생이 힘들기는 하지만 매케이의 지적처럼 "진리는 길에서 발견된다. 사람은 자신의 의지로든, 아니면 섭리적인 환경에 의해 내쳐지든, 발코니에서 길로 내려올 때에만 현실이 무엇인지 비로소 알게 된다."
때로는 발코니 위에서 인생 길을 내려다볼 필요도 있다.
그러나 높은 발코니에 앉아 있는 사람들도 길 위의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특히 그들이 동료 여행자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발코니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더 멀리 볼 수 있습니다. 길 위의 사람들이 다음 모퉁이까지만 볼 수 있을 때도, 발코니에 앉은 사람들은 그 길이 어디로 향하고 있으며 무엇을 비켜가고 있는지 볼 수 있습니다. 특별히 신학자들은 과거 여행자들의 축적된 지혜를 지금 필요한 사람들에게 전해주는 역할을 감당합니다. 신학자들은 고난을 다른 관점에서 볼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중세의 위대한 저술가였던 살리스버리의 요한(John of Salisbury)은 신학자가 마치 "거인의 어깨에 앉아 있는 난쟁이" 와 유사하다고 말했습니다. 신학자들은 더 많이, 더 멀리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위대해서가 아니라, 그들을 어깨에 태우고 있는 거인의 키가 컸기 때문입니다. 발코니에 걸터 앉는 것은 세대를 걸쳐 새로울 것이 없는 문제들과 씨름해 온 수많은 기독교 사상가들의 어깨에 앉아 있는 것과 같습니다.
'발코니 위의 시각' 이 가진 한계와 가치
앨리스터 맥그래스의 새 책 『고난이 묻다, 신학이 답하다』(국제제자훈련원 역간)는 2010년 고난의 인생 길을 걸어가는 우리에게 잠시나마 발코니 위의 시각을 갖도록 도와줄 것입니다. 그리고, 새 예루살렘에는 고난이 설 자리가 없다는 것, 그곳에서 우리의 고난은 단지 추억이 되어있을 것이라는 소망을 품고 인생 길의 또 다른 모퉁이를 돌아설 용기를 얻게 해 줄 것입니다. 다가오는 고난주간,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우리 육체에 채워야할 영적 지도자인 우리들 자신에게, 우리가 이끌어야할 지체들에게 발코니 위의 시각을 적용해보면 어떨까요?
※ 이 글은 앨리스터 맥그래스의 책 『고난이 묻다, 신학이 답하다』에서 발췌, 정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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