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십] 459호 - 크리스마스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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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는 믿음 외에는 가진 게 아무것도 없는데도 행복해 보이는 가족이 있는가 하면, 믿음 외에 모든 필요를 다 가졌으면서도 내면은 텅 비었고 황량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가난하지만 평온하고, 어떤 이들은 풍요롭지만 불안합니다. 어떤 이들은 관용의 기쁨을 알지만, 어떤 이들은 야망이 주는 외로움 밖에 모릅니다. 어떤 이들은 하늘을 바라보며 그곳에 소망을 두지만, 어떤 이들은 자신만을 바라볼 뿐입니다. 어떤 이들은 영적 세계의 신비를 경험했지만, 어떤 이들은 얄팍한 물질세계에 갇혀 지냅니다.

왜 이런 차이가 생기는 걸까요? 예일대 법대를 졸업하고 <시카고 트리뷴>지의 법률담당 편집자로 일했던 리 스트로벨은 기자로서 사실, 증거, 자료, 구체적인 현실 같은 것들에 훨씬 더 흥미를 느끼던 사람이었습니다. 처녀는 임신할 수 없고, 아기가 된 신은 존재하지 않으며, 크리스마스는 미국이라는 거대 기업의 탐욕에 놀아나는 연례적인 소비의 향연에 불과할 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던 그가 불가지론자였던 아내가 기독교로 개종하면서 복음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기자의 예리함으로 크리스마스의 근원에 대해 조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크리스마스 사건”(사랑플러스)이라는 제목으로 그 조사의 내용을 엮어내었습니다.

오늘은 그의 책의 세번째 파트 “행적의 증거: 예수는 하나님의 속성을 구현했는가?”를 요약정리하면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합니다. 예수라는 인물을 면밀히 살펴보았을 때, 성경의 다른 곳에 묘사되어 있는 하나님의 모습에 부합될까요? 예수님은 가버나움의 외곽의 산중턱에서 산상수훈을 설교하면서 동시에 여리고의 중심가에 서 있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그가 무소부재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마가복음 13장 32절을 보면 그분은 장래 일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고 인정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전능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분이 영원한 존재라면 골로새서 1장 15절에서 왜 그를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라고 부르고 있을까요? 리 스트로벨은 탁월한 복음주의 신약신학자인 D. A. 카슨 박사와의 인터뷰를 통해 이 문제를 풀어갑니다.

: 예수님의 말이나 행동 중 어떤 것을 보고 그 분이 하나님이라고 확신하십니까?
: 기적이 신성을 나타낼 수 있을지는 몰라도 결정적인 요소는 아니지요. 물론 부활도 그분의 신분을 입증하는 결정적인 증거였지만 그분이 행하신 많은 일들 중에서 나에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분이 죄를 용서하신 것입니다.
당신이 나에게 뭔가를 잘못하면 나는 당신을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을 갖게 되지요. 그런데 다른 누군가가 와서 ‘당신을 용서해 주겠소.’라고 말한다면 어떻겠습니까? 진정한 의미에서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는 하나님뿐입니다. 왜냐하면 죄는 우선적으로 하나님과 그분의 법에 대한 도전이기 때문이지요.
예수님께서 죄인들에게 ‘네 죄가 용서받았다.’라고 말씀하셨을 때 유대인들이 신성모독이라고 생각했던 이유는 ‘하나님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 예수님은 동시에 두 장소에 있을 수 없었는데 도대체 어떻게 예수님이 무소부재한 존재일 수 있나요? 또 ‘인자도 그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한다.’라고 말한 그분이 어떻게 전지하다고 할 수 있는 건가요? 그분이 자기 고향에서는 기적을 많이 행하지 못했다고 밝히는데 왜 그가 전능하다는 거지요?
: 역사적으로 이 문제에 대한 두세 가지의 접근법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 한 가지는 케노시스(Kenosis) 사상입니다. 케노시스는 ‘비운다’는 뜻입니다. 이 사상은 빌립보서 2장에서 바울이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라고 말한 데서 나온 것입니다. 그분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의 신성 자체를 비우셨다면, 그분은 더 이상 하나님이 아니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적인 속성을 비우셨습니까? 본질과 속성을 구별하는 게 어렵고, 하나님이 자기의 신적인 속성을 비워 냈으면서도 여전히 하나님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습니다.
어떤 분들은 ‘그분은 자기의 속성을 비운 것이 아니라 자기의 속성을 사용하기를 포기하신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스스로를 제한하셨다는 것이죠. 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방법으로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분은 자기의 속성을 독립적으로 사용하기를 포기함으로써 자신을 비우셨다.’라고 말합니다. 즉 하나님 아버지가 그렇게 하도록 허락하실 때에만 하나님과 같은 행동을 하셨다는 것이지요. 그래도 이 이론이 가장 정답에 가깝다고 볼 수 있습니다.
     
: 요한복음 3장 16절은 예수를 하나님의 ‘독생자’라 했고, 골로새서 1장 15절은 그를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시간 속에서 창조된 존재라는 사실을 강하게 암시하는 것 아닌가요?
: 요한복음 3장 16절의 ‘독생자’라는 헬라어 원문은 ‘유일하고 사랑받는 자’라는 뜻으로 사용된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예수님이 존재론적으로 시간 속에서 잉태되었다고 말하고 있기보다는 예수님이 단 하나뿐인 사랑받는 아들이라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골로새서의 ‘먼저 나신이’라는 용어는 적법한 상속자에게 주어지는 권리의 개념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표현은 ‘최고 상속자’라고 번역하는게 더 적합할 것 같습니다. 골로새서 1장 15절의 ‘먼저 나신 이’라는 용어는 골로새서 2장 9절의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라는 맥락과 연결해 사용해야합니다. ‘먼저 나신 이’라는 용어는 예수님의 영원성을 배제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 용어 안에 신성의 모든 충만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신성을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자기의 속성을 제한한 자발적인 ‘자기 비움’의 삶을 사신 분입니다. 우리를 위해 자기의 생명을 내어 줌으로써,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크리스마스 캐럴 가사처럼, “천사 찬송하기를, 하나님과 죄인들이 화목케” 되었습니다.

크리스마스는 하늘을 나는 사슴에서부터 굴뚝을 타고 내려오는 산타클로스에 이르기까지 온갖 공상적인 이미지로 채색된 명절입니다. 그러나 그 중심을 파고들어가 보면 크리스마스가 역사적인 사실(성육신)에 근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됩니다. 이번 한 주간, 그 어떤 성탄 선물보다 더 귀한 “아기 예수님”을 풍성히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크리스마스 사건

해마다 12월이 되면 온 세상은 크리스마스트리로 반짝인다. 사람들은 들뜬 마음으로 크리스마스를 기다리고 계획한다. 하지만 누구를 위한 크리스마스인가? 우리는 왜 이 날을 기념하고 축하하고 즐거워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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