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훈련] 173호 - 훈련생의 노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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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매일 변화를 소망한다. 그것은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가면서 예수님께서 나를 온전히 통치하시는 대로 사는 영적 성장을 소망하는 것이자, 매순간 하나님을 하나님의 위치에 두지 않는 나의 ‘평범’을 넘어서는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metamorphoo'의 상태로서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써 변화되는 모습인 것이다. 그러나 존 오트버그가 ‘경계표시 신앙’이라고 말했듯이, 그러한 나의 변화를 소망하는 가운데, 자신도 모르게 그 어떤 christian의 외형적 모습을 나의 모델로 삼고 ‘영적으로 보이려고’ 애쓰며 세상의 믿지 않는 자들을 함부로 정죄했던 나의 누추한 모습을 다시 본다.

이 모든 나의 한계들은 ‘자유하며’ 오직 지혜를 구하는 가운데 행해지는 노력과 영적 훈련으로만 극복될 수 있을 것이다. 오직 나 자신과 하나님과의 진정한 관계 맺기를 사랑하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더욱 풍성히 느끼기 위해서. 그 훈련 과정을 위해 내가 다시 돌아보게 된 것은, 너무 바쁜 일과를 쫒아 다니느라 하나님과의 만남의 시간을 미루는 일이며, 어느 순간 지쳐서 안마의자에 앉아 TV의 외화를 보며 “난 쉬어야 해”라고 혼잣말을 하는 일이다. 그나마도 ‘영어를 자꾸 들어야 하니까’라는 일과 관련된 강박적인 핑계를 대면서. 존 오트버그가 ‘텔레비전의 플러그를 뽑는 것’을 말한 걸 보니, 나 같은 사람이 적지는 않은 모양이다. 그리고 너무나 자주, 사람들이 내게 “많이 바쁘시죠?”라고 말하는 걸 보면, 무엇보다도 내게 절실히 필요한 첫 단계는 역시 ‘천천히 사는 삶’임을 깨닫는다. 이 역시 바쁜 일과 속에서 많은 일을 빨리 처리해야 한다는 나의 강박증과 일에 대한 나의 완벽주의에서 비롯된 것인데, 존 오트버그가 인용한 Carl Jung의 말, “조급함은 마귀에게 속한 것이라기보다 마귀 그 자체다” 대목을 보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도 결코 한가하게 지내시지는 않으셨지만 조급해 하시거나 바쁜 통에 지쳐버리시지는 않았는데 말이다.

혼자만의 시간…그때 나의 존재는 나의 업적이나 소유나 사회적 관계에 달려있지 않고, 단지 나 자신과 나의 죄성, 내가 하나님을 갈망하는지 그렇지 않은지의 사실만이 남는다.(p.134)

그렇다. 혼자만의 시간을 통해 오로지 하나님과 나를 잇는 빛의 통로를 통해 하나님께 향해 가며, 벌거벗은 기도의 시간을 가질 때, 하나님께서는 기도의 능력을 주시고 나의 상황을 변화시키셨던 놀라운 일을 늘 기억하자. 하나님 안에서 어린아이처럼 작아지고 겸손해질 수밖에 없듯이, 다른 사람들을 겸손과 온유로 사랑하자. 하나님의 본체이셨고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며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지셨던 예수님의 모습을 닮아가자. 그것은 이 책에서 깊은 묵상을 하게 하는 대목(p.179)을 발견한 뒤 더욱 깊게 생각했던 부분이다.

예수님께서는 종의 외형을 가지신 게 아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종 되심과 신성을 표현할 때도 모르페(morphe: 모양, 모습, 형태)라는 똑같은 단어를 사용한다. 예수님께서 종의 형체로 오신 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지를 감추고 가장하신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계시하신 것이다…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종으로 오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라는 바로 그 사실 때문에 오셨다.(p.179)

나에겐 놀라운 말이었다. 나는 희미하고 애매하게도 ‘하나님이라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종으로 오셨다’고 무의식적으로 생각해 왔던 것이다. 나의 죄를 대속하시고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과의 통로를 회복시켜 주시기 위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하나님 본체이시자, 하나님이라는 바로 그 사실 때문에 오셨다는 것, 그것을 깨달을 수 있었던 은혜를 받은 바울. 그래서 ‘종 되심’과 ‘신성’ 모두를 ‘morphe’ 라는 말로 표현했던 바울이었다.

‘종 되심’이란 무엇인가. 존 오트버그처럼 틈틈이 나도 모르는 새에 겸손을 가장하며 나 자신을 돋보이게 하려는 것, 남이 잘 되면 갑자기 초초해지는 것, 그런 사실을 christian이라는 나의 경계신앙 표시 안쪽 벽에 다시 감추는 것, 그러면서도 틈만 나면 남의 허물을 들추어내어 판단하고 비난하고 싶은 마음을 ‘겸손’이라는 껍질로 덮는 것. 예수님의 ‘종 되심’ 닮아가기는 그 모든 것의 반대편에 서는 것이다. 이 역시 끊임없이 영적 훈련을 하는 과정으로만 실현될 수 있는 일이다.

용서와 구원의 확신에도 불구하고 그림자처럼 따라붙는 과거의 죄성을 자백하는 일로 출발하기 위해 존 오트버그는 ‘영적 얼룩 제거의 6단계 과정’을 말했다.(p.206)

1)성령의 돌보심에 맡기고 도움을 간구하는 시작
2)자기 점검
3)자신의 죄를 성령 가운데 인식하는 것
4)고백 후 성령 안에서 새로운 느낌을 느끼는 일
5)자신의 죄를 인식하고 죄로 인한 외적인 모든 관계를 회복하는 새로운 약속
6)다시 지지 않을 모든 죄의 짐을 하나님께 내려놓고 해방과 치료의 은혜 속에 사는 것

그렇게 ‘다시’ 물가에 심긴 나무가 되어 해방과 치료의 은혜 속에 사는 것 자체가 ‘인도받는 삶’이다. “너를 지키시는 자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아니하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시편 121:3-4)(p.234)라고 했다. 그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삶, 얼마나 행복한가.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이 나를 지켜주심은 영원할 것이지만, 그 보호하심을 당연시하게 되는 방만함을 경계하자. 늘 하나님께 귀 기울이고 성령이 인도하시는 기도 가운데 그 말씀에 작은 일부터 순종하자. 그러나 내가 하나님께 속한 사람일지라도 현재 내게 주어진 삶은 세상을 등지거나 고립된 삶을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나를 비판하는 사람들과 함께 자유롭게 사는 것이며 세상의 칭찬으로부터도 자유롭게 사는 것이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갈 1:10)(p.251)

바울의 말처럼 세상으로부터의 인정중독을 멀리하고, 사람들에게 보이는 ‘의의 행함’을 경계하자. 하나님과 나의 은밀한 기쁨의 통로에서 참 자유를 얻는 일은 존 오트버그가 적절히 인용했듯이 ‘난로의 문을 너무 자주 열면 안된다’는 사실이었다.(p.266) 난로의 문을 자주 열어서 뜨겁고 은밀한 참 자유를 세상에 드러냄으로써 그 자유함의 순전함이 식어버리지 않게 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그것이 나를 분열되지 않는 완전한 삶으로 인도하실 것을 믿음으로 기도하자. 존 오트버그의 말처럼 ‘인생의 비밀은 한 가지만 추구하는 것’이므로. 어려서부터 길거리의 불쌍한 사람들을 보면 나도 모르게 그를 위해 기도하며, 도울 사람들 돕는 것이 당연하다는 ‘나의 선함’ 자체를 자랑스럽게 생각했던 것 자체가 하나님 안에서 아무 것도 아님을, 그것마저 무(無)로 돌리는 완전한 삶을 향해서.

매일 아침 눈을 뜰 때, 하나님께 하루를 고백하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하루를 위해 기도하기를. 매일 밤, 잠자리에 들 때 하루를 돌아보며 자신을 정돈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기를. 때로는 실족하고, 때로는 게을러지더라도 하나님과 동행하는 훈련에 인내를 갖도록 기도하기를. 알 수 없는 내일의 상황에도 불구하고 매일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성령의 도움으로 깨닫고, 의심되거나 회의적일 때조차 그 말씀에 순종하기를. 끝없이 암흑과도 같은 심연의 밑바닥까지 내려갔을 때 두려운 가운데에서도 실낱같은 빛줄기를 따라 헤쳐 나오게 하셨던 성령의 도우심을 매일 기억하며…Amen.

평범 이상의 삶
그리스도인의 삶은, 죄 사함 또는 천국행 티켓, 그 이상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영적 삶'에만이 아니라, 우리 삶의 작은 부분까지도 관심 있으시다.나의 평범한 삶에 예수님이 들어오신다면, 어떻게 사셨을까?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존 오트버그는 기독교의 역동적인 핵심인 변화와 성장을 일으키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 주목하도록 하며, 그것을 얻는 방법을 가르쳐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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