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십] 796호 - 포스트 코로나를 준비하는 다섯 가지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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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는 세상의 규범과 질서를 바꾸어 놓고 있습니다. 경제지 포브스(Forbes)에 따르면 코로나 이후의 새로운 기준인 뉴 노멀(New Normal)의 시대가 돌연했다고 말합니다. 대면 접촉 서비스의 불황, 언택트(Untact) 문화의 확산과 같은 새로운 사회, 문화적 변화 양상 및 영향으로 산업구조도 새롭게 개편되고 있습니다. 이제 BC(Before Corona)와 AC(After Corona)는 확연하게 달라졌습니다.

히브리인들은 바벨론 포로로 끌려갑니다. 하나님께 제사드리는 성전은 파괴되었습니다. 더 이상 제사를 드릴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천지가 무너지는 위기 속에서 대안을 찾았습니다. 바로 ‘안식일’과 ‘회당’입니다. ‘장소의 종교’에서 ‘시간의 종교’로 이동했습니다. 시간을 성화(sanctification)합니다. 안식일의 재발견이었습니다. 그들은 알았습니다. 시간을 정복한 사람만이 장소를 정복할 수 있다는 것을 말이죠. 나아가 ‘회당’에서 토라를 들었습니다. 그곳에서 신앙교육이 행해집니다. 그들이 나라를 잃은 것은 기원전 6세기였습니다. 1948년 독립할 때까지 거의 2500년이 흘렀습니다. 멸종해야 할 민족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살아남은 비밀이 여기에 있습니다. 세계 최고의 불가사의입니다.

코로나19로 절망의 21세기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좋은 위기를 낭비하지 말라”(Don’t waste a good crisis)는 윈스턴 처칠의 말이 절절합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변화해야 합니다. 아니 기회를 붙잡아야 합니다. 포스트 코로나를 준비하기 위한 다섯 가지 생각을 통해 진지한 고민을 함께 나누어 봅시다.

1. 가장을 ‘가정의 제사장’으로 세우자
코로나19는 집 밖을 맴돌던 가족들을 가정으로 돌아오게 했습니다. 뜻밖의 ‘귀가 명령’은 선물이 아닌 악몽이 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낯섭니다. 집은 여인숙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최후의 보루인 가정이 허물어진 것을 여실히 보았습니다. 가정의 재발견이 코로나19가 가져다준 선물 중 선물입니다.

가정 안에서 이제 하나님을 만나는 법을 가르쳐야 합니다. 신앙의 보물과 같은 가정예배를 되찾아 와야 합니다. 교회에 맡겼던 위탁 신앙을 주체적으로 전환해야 합니다. 주일학교 ‘교사 중심’의 신앙교육을 ‘부모 중심’으로 돌려놓아야 합니다. 부모가 자녀 신앙의 최종 책임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가장을 가정의 제사장(창 18:19)으로 세우는 운동이 시작되어야 합니다. 오늘날의 회당은 가정입니다.

2. 교회를 ‘가정’처럼, 가정을 ‘교회’처럼 바꾸자
집은 출생부터 죽음까지를 담아내는 그릇이었습니다. 집이 병원이었고 학교였습니다. 그리고 부모의 멘토링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병원과 학교와 학원 그리고 외식산업이 모든 것을 앗아갔습니다. 집의 기능을 돼 찾아와야 합니다. 차를 마실 수 있는 가장 좋은 공간을 놓고도 우리는 찻집을 찾습니다. 비극 중의 비극입니다.

거대한 예배당이나 사원이 아닌 가정을 세우는 것이 헤셀이 말했던 ‘새로운 감각’입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상담기법을 알아 심리 주치의가 되어야 합니다. 돌봄과 정서를 어루만지는 교사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가정사역의 많은 콘텐츠들을 가르치고 공급하는 은혜의 저수지 역할을 해야 합니다.

3. ‘가족 친밀감’을 높이기 위한 콘텐츠를 더 많이 개발해야 한다.
가족관계의 핵심은 ‘친밀감’입니다. 친밀감이 행복의 잣대가 됩니다. 서로의 친밀감을 증대시키기 위해 익혀야 하는 것이 대화의 기술입니다. 갈등이 생겼을 때 합리적으로 풀어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따로 국밥’이 아닌 ‘가족’으로 기능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주신 최고의 선물은 몸입니다. 그런데도 몸은 가장 외면당합니다. 아이들과 놀아준다는 게 고작 놀이기구에 태우는 일입니다. 서로의 몸과 몸을 부딪치게 해야 합니다. 친밀감은 몸의 거리로부터 옵니다. 이제는 머리를 쓰는 데서 몸을 쓰고 가슴으로 느끼는 공감·배려·환대(벧전 4:7~11)를 가정에서 익혀야 합니다.

4. ‘오래된 미래’에서 답을 찾자
과거 속에 답이 있습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할머니가 들려주시던 이야기입니다. 이야기 속에 인생 지혜가 가득 담겨 있었습니다. 인생이 무엇인가요? 이어령 박사는 ‘이야기 하나 남겨 놓고 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우리에게는 할머니도 이야기도 없습니다. 할머니를 대신해 주는 것이 ‘책’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합니다. “세계는 한 권의 책이다. 책 속으로 떠나지 않으면 한 쪽짜리 인생이다.”

교회는 작은 도서관 꾸미기 운동을 해야 합니다. 신앙 고전을 손에 들게 해야 합니다. 인문·과학·예술·상식 등 폭넓게 세상을 누비게 해야 합니다 교회는 책 읽기 운동의 진원지가 되어야 옳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은 서점 방문과 도서관 찾기를 가족 행사로 갖게 하면 어떨까요? 유대계 미국 시인 조셉 브로드스키가 말합니다. “분서(焚書)보다 나쁜 범죄들이 있다. 그중 하나는 책을 안 읽는 것이다”

5. 집을 바꿀 수 없다면 ‘공간 재배치’라도 해야 한다
코로나19의 고립을 막아준 것은 뜻밖에도 ‘발코니’였습니다. 이탈리아 나폴리의 한 공동주택 발코니에서 시작된 팝송 ‘아브라치아미’(Abbracciami, 안아주세요)가 발코니를 따라 동네로 퍼집니다. 악기 대신 주방기구를 들고 나와 두드리고 흔듭니다. 떼창이 따라옵니다. 발코니는 지친 영혼의 대피처이자 이웃과 연대하는 중간지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네 집은 베란다도 거실로 다 바꾸어버렸습니다. 그 자리엔 가구로 가득 채워졌습니다. 여전히 우리는 집의 크기로 기싸움을 하고 자존감을 장식물에서 찾고 있습니다. 비극입니다.
집을 바꿀 수 없다면 가구라도 재배치해서 가족들이 함께 할 수 있는 공동놀이방과 학습장이라도 만들어야 합니다. 공간의 미학을 되찾읍시다.

“스물세 살 청년 아이작 뉴턴에게 1665~1666년은 절망의 시기였다. 페스트가 덮쳤다. 당시 런던 인구 46만 명 중 16%인 7만 5000명이 희생됐다. 다니던 케임브리지 대학교도 문을 닫았다. 청년은 낙향했다. 혹독한 시간, 뉴턴은 사고의 힘을 키웠다. 동이 터 해가 퍼질 때까지 생각하고 생각했다. 문명사적 3대 창안이 이어졌다. 빛의 신비, 만유인력, 미적분이다.”(아널드 브로디, 『인류사를 바꾼 위대한 과학』)
과학계선 이를 뉴턴의 ‘아누스 미라빌리스’(Annus Mirabilis)라고 부릅니다. 라틴어로 ‘기적의 해’라는 뜻입니다. 기적의 해가 ‘아누스 미라빌리스’(Annus Mirabilis)가 될지 ‘아누스 호리빌리스’(Annus Horribilis, 끔찍한 해)로 기억될지는 우리의 선택에 달려있습니다.

이 글은 『코로나이후를 준비하는 열 가지 생각』 크리스채너티 투데이 한국판 2020년 5월호 중 일부를 발췌 및 각색하여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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