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큰 교회나 사역단체가 아니라 위대한 크리스천들이라는 사실은 성경과 역사가 공히 증언하는 바입니다. 물론 위대한 크리스천이라는 것은 영적 크기가 폴리갑(Polycarp)에 버금가는 사람을 말합니다. 폴리갑은 로마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전면적으로 기독교를 탄압했던 2세기 당시 서머나 교회의 감독이었습니다. 역사상 폴리갑 만큼 큰 크리스천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그는 “내가 살아온 86년간 주님은 한 번도 저를 실망시키시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어찌 저를 구원해 주신 왕을 욕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고백하며 순교했습니다.
세상을 위해 세상을 거스르라 요즘은 예수님을 믿은 대가로 폴리갑만큼 심한 육체적 고난을 당하는 일은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기독교가 세상을 변화시키는 데 최대 걸림돌은 육체적 위험이 아니라 세상적인 패턴입니다. 세상적인 패턴은 영혼의 잠입니다. 이 잠에 빠지면 세상의 지위와 쾌락, 안위가 매력적으로 보이고 성경의 진리는 뜬구름을 잡는 이야기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말로는 성경의 진리를 믿는다고 하면서 그 진리를 마음에 새기거나 그 진리대로 살지 않습니다. 따라서 대부분의 크리스천들에게 가장 큰 위험은 박해가 아니라 유혹입니다.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고전 9:22)이 돼야 하지만 이 세상의 패턴까지 맞춰야 하는 건 아닙니다. 세상과 구별되어야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위해 세상을 거슬러야 세상이 변합니다. 세상과 달라지지 않으면 결코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우리 시대 폴리갑은 다 어디로 갔는가? 다른 문화권에 가면 자신의 문화권에서 당연시되는 행동이 다른 문화권에서 이상한 행동으로 취급받습니다. 하지만 두어 달만 지나면 문화 충격은 감쪽같이 사라집니다. 그래서 선교사 친구 중 한 명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충격은 결국 순응에 자리를 내준다.” ‘모든’ 크리스천들에게도 어디서 무엇을 하고 살든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깊은 차원의 문화 충격이 있습니다. 악한 세상에 대한 문화충격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충성스럽게 따르려면 이 세상의 악한 패턴에 대한 문화 충격 상태를 계속해서 유지해야만 합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우리는 믿음을 약화 시키는 세상의 패턴에 대해 심리학자들이 말하는 ‘인지 부조화(cognitive dissonance)’를 유지해야 합니다. 크리스천들이 세상 속으로 들어가 세상을 변화시키려면 결코 충격을 순응의 자리에 앉게 하면 안 됩니다. 세상에 대한 긴장이 풀려 세상이 편안해진다면 결코 그리스도의 충성스러운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21세기의 폴리갑은 다 어디로 갔습니까? 큰 교회와 큰 사역 단체는 즐비한데 큰 크리스천은 다 어디 숨었는지 도통 보이질 않습니다. 세상과 다른 믿음의 길을 걷기 위해 육체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죽을 각오가 된 크리스천들이 과연 얼마나 남아있습니까? 그리스도를 위해 기꺼이 전부를 내놓을 수 있는 크리스천들이 과연 얼마나 남았습니까?
예수님은 어중이떠중이가 아니라 제자들을 찾으셨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참된 제자를 얻기 위해 주님은, 따르겠다는 자들에게 대가를 신중히 따져 보라고 요구하셨습니다. 예수님에 따르면 크리스천의 삶은 매일 같이 죽는 삶입니다. 만약 모든 크리스천의 영적 크기가 폴리갑과 비슷했다면 이 세상이 얼마나 더 복음으로 물들었을까요? 교회가 폴리갑과 같은 믿음의 거인들로 발 디딜 틈이 없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세상을 똑바로 뒤집는 데는 성령 충만한 제자 열두 명이면 충분했습니다(행 19:7). E. M. 바운즈는 이런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인간들은 하나님의 도구다. 교회는 더 나은 도구를 찾고 있지만 하나님은 더 나은 인간들을 찾고 있다.”
※ 이 글은 튤리안 차비진의 신간 『더 크리스천』(두란노 역간)의 part 4에서 발췌, 정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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