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상대주의자들은 "우리가 항상 바닐라 아이스크림보다 초콜릿 아이스크림을 더 좋아한다고 해서 초콜릿 아이스크림이 진짜 아이스크림이고 바닐라 아이스크림은 가짜라고 말해서는 안된다"라고 주장합니다. 신앙에 있어서도 "세계의 다양한 종교들이 각기 올라가는 길은 달라도 결국은 같은 정상에서 만난다"고 주장하지요. 오늘날 소위 지성인들은 소수민족이 받는 차별을 시정하거나, 국가 부채를 해결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을 제시할 때는 자신과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들을 설득하거나 그들의 '견해를 바꾸어' 자신의 견해를 따르게 하려고 애쓰지만, 사람들이 신앙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점들을 아주 진지하게 받아들여 한 신앙을 버리고 다른 신앙을 받아들이라고 요구할 경우에는 상대주의의 기준으로 공격해옵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절대성을 버리고, 종교적 상대주의를 수용하는 것이 종교의 다원성에 공평하고 편견 없이, 깨인 생각으로 다가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마치, 지성인이라면 상대주의의 태도를 견지해야만 할 것 같은 부담을 안겨주는 것이 사실입니다.
정말 회개나 전도, 또는 거듭남 같은 말을 하면 공격적으로 들리기 때문에 자제해야하는 것일까요?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행 4:12)는 말씀을 붙들고 전도하는 것은 무례한 일이기에 그만두어야만 하는 것일까요?
하버드 대학교에서 역사를 공부하고,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원에서 신학을 공부한 딕 카이즈는 『카멜레온 기독교』(국제제자훈련원 역간) 제 5장에서 상대주의가 가진 문제점들을 조목조목 지적합니다.
관용은 우리가 진리를 전하려는 노력을 그만두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사람들은 우리가 상대주의에 의문을 제기하면 관용을 모르고 민주주의에 반대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상대주의 자체가 보기 보다 더 관용이 없습니다. 우리가 사람들에게 관용을 베풀어야 하지만, 사람들의 모든 사상과 행위에도 관용을 베풀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관용하려다가 사회를 바꾸려고 노력하는 일을 피하는 것이 도덕적 의무가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상대주의는 '군중을 잠들게 하는 마취제'
사실 어느 누구도 아는 게 없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 다른 종교 사상을 놓고 어느 것을 선택해야 할지 고민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상대주의의 주장입니다. 상대주의자에게 오로지 중요한 것은 행복하고 성실하게 사는 것,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상대주의는 '군중을 잠들게 하는 마취제'입니다.
종교적 상대주의는 상위종교(over religion)
"세계의 다양한 종교들이 각기 올라가는 길은 달라도 결국은 같은 정상에서 만난다"는 주장은 속임수에 불과합니다. 오히려 종교적 상대주의는 모든 종교를 해석하고 그 종교들이 서로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해석할 수 있는 패러다임, 즉 하나의 상위종교(over religion) 역할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 종교적 상대주의 자체가 오히려 하나의 절대 주장인 것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상대주의가 가진 오류는 상대주의가 이런 비판을 제기하면서도, 정작 상대주의만은 이런 비판에서 자유롭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영적 지도자 여러분! 이제 올가을 영적 추수를 준비해야할 때가 다가왔습니다. 이 땅의 교회들 마다 죽어가는 영혼들에게 하나님의 절대 진리를 선포하고, 그 날에 믿기로 작정된 자들이 다 주님 품으로 돌아오는 역사를 눈으로 목도하며 대각성을 경험하기를 원합니다. 종교적 고매함으로 포장한 채, 죽어가는 영혼을 외면하는 어리석은 상대주의자가 아니라, 내가 얻어 누리는 생명의 길을 관용하며 소개할 수 있는 하나님의 동역자가 되어보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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