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그룹] 261호 - 믿는 성도는 안락사를 어떻게 보아야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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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학기가 시작되었습니다.
2009년의 2학기도 소그룹 네트워크가 여러분들의 소그룹 사역에 큰 도약대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국내 첫 존엄사 시행 대상이 되었던 “김 할머니(77세)”는 6월 23일 인공호흡기를 제거한 이후에 아직도 생존해 있습니다. 인공호흡기를 뗀 후 3시간 안에 사망할 것이라던 의사의 말과는 달리 생명은 하나님의 손에 달린 것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실감하게 된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2005년 미국에서 있었던 테리 시아보(Terry Schiavo) 사건도 많은 사람들이 안락사와 관련된 윤리학적 쟁점들에 보다 주의를 기울이게 만들었습니다. 테리 시아보는 생명 유지 장치에 의지해 여러 해 동안 삶을 연장해 왔습니다. 그녀의 부모는 그녀를 식물인간 상태로라도 살려 두기 위해 법정 투쟁을 계속했지만, 정부는 테리가 지속적인 식물인간 상태로 삶을 연장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고 진술한 남편의 손을 들어 주었습니다. 테리는 생명 유지 장치를 제거한 지 13일 후인 2005년 3월 31일에 죽었습니다.

안락사와 관련된 쟁점은 옳고 그름을 질문하기에는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안락사에는 다양한 유형이 있기 때문입니다. 믿는 성도로서 우리는 이런 윤리적인 이슈들을 어떻게 바라보아야할까요? 오늘은 노먼 가이슬러의 신간 “기독교 윤리로 세상을 읽다”(국제제자훈련원, 라이언 스너퍼 공저)의 제21장 “안락사” 부분을 정리하면서 소그룹 지도자로서 “안락사”라는 윤리적 이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할지 정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안락사’는 ‘편안한 죽음’이라는 의미를 가진 자비로운 살인(mercy killing)으로도 불립니다. 사생활을 추구할 수 있는 헌법상의 권리에는 존엄하게 죽을 권리도 포함된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안락사 옹호자들은 말기 질병이나 심각한 우울증으로 고통하기보다는 의학의 도움을 받아, 혹은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것이 한 사람의 존엄성을 지키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1. 적극적 안락사

적극적 안락사는 오늘날 미국 전역에서 법정과 입법부 회기 동안 자주 토론되고 있는 안락사의 유형입니다. 그러나 많은 교회와 복음주의적 리더들이 적극적 안락사를 강력하게 반대하고 있습니다. 과연 인간은 자신의 삶을 끝낼 시기를 결정할 수 있을까요?
적극적 안락사의 옹호자들은 인간이 존엄하게 죽을 헌법상의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믿고 주장합니다. 또한 안락사가 고통당하는 자에게 자비를 베푸는 행동이라고 믿습니다. 환자가 겪어야만 하는 고통의 기간을 줄여 주고 가족들과 사회가 감당해야 할 엄청난 경제적인 짐을 덜어 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무고한 한 사람을 의도적으로 죽일 수 있는 도덕적 권한이 없습니다. 의사의 손을 통해서 이루어지든, 스스로 목숨을 끊든 안락사는 살인행위의 한 형태입니다. 적극적 안락사는 생명의 존엄성 원칙, 하나님의 주권 원칙과 충돌합니다.
때때로 하나님은 고난당하는 사람이나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교훈을 가르치시기 위해 고난을 사용하십니다. 말기 질환으로 고생하는 사람을 돌보는 많은 사람들이 그 경험을 통해 보다 더 강해지고 보다 영적인 사람이 되었다고 증언합니다. 생명의 존엄성을 믿는다면 가족들과 사회가 감당해야 할 경제적 짐도 쉽게 정리됩니다. 한 사람의 생명에는 어떤 가격표도 붙일 수 없습니다.

2. 비자연적 소극적 안락사

보통 안락사라고 지칭할 때는 적극적 안락사와 비자연적 소극적 안락사를 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비자연적 소극적 안락사는 음식이나 공기나 물과 같이 인간 생명에 필수 불가결한 요소들을 제공하지 않음으로써 시행합니다. 이런 필수요소들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의도적으로 제공하지 않는 것은 살인에 해당합니다.
안락사를 반대하는 사람들 중에는 환자가 질병으로 고통 받는 기간 동안 가능한 고통을 줄여 주기 위해 진정제나 다른 수단을 제공하는 것을 거의 반대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잠언 31장 6-7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독주는 죽게 된 자에게, 포도주는 마음에 근심하는 자에게 줄지어다 그는 마시고 자기의 빈궁한 것을 잊어버리겠고 다시 자기의 고통을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3. 자연적 소극적 안락사

자연적 소극적 안락사는 기계적인 장치나 다른 인위적인 수단을 제공하지 않음으로써 환자가 죽음을 맞이하게 하는 것입니다. 만약 말기 환자에게 이 원칙을 적용한다면,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그것을 나쁜 것으로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생명 유지 장치에 의지한 채 혼수상태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이 경우에 포함됩니다. 이 견해와 충돌하는 어떤 명확한 원칙도 성경 속에서 발견할 수 없습니다. 자연적인 소극적 안락사는 생명을 취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자연적으로 죽음이 찾아오도록 내버려 두는 것입니다.
인공적인 수단을 통해서만 생명을 유지해 온 사람에게 그런 방식으로 계속 생명을 유지하도록 강요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사람은 스스로 결정을 내릴 수 없는 상황에 도달할 경우를 대비해 사망 희망서(불치의 병으로 식물인간이 되느니 죽기를 원한다는 문서)를 작성함으로써 자연적 소극적 안락사를 법적으로 미리 계획할 수 있습니다. 사망 희망서를 활용하는 것은 가족들이 자연적 소극적 안락사를 결정하는 데 따르는 부담을 덜어 줄 것입니다.
임종은 과정입니다. 죽음은 그 과정의 정점입니다. 일단 말기 질병이 걸리고 나면, 하나님께서 기적적으로 개입하지 않으시는 이상 죽음이 찾아오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고통당하며 죽어가는 사람이 인공적인 수단으로 생명을 연장하고 있다면 그것은 죽음을 연기하는 것으로도 생각될 수 있습니다.
이 관점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생명의 존엄성을 들어 인간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우리의 능력 범위 안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야만 한다고 주장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입장은 죽음의 문제를 하나님의 손에 맡겨드릴 만큼 충분히 하나님의 주권을 신뢰하지 않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의 생명을 유지하기로 하시면, 그렇게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기술과 의약품의 도움이 있든 없든 간에 기적을 일으키실 수 있습니다.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할 사항

우리가 자연적 소극적 안락사를 허용할 수 있다고 해서 모든 경우에 자연적 소극적 안락사를 허용하는 일을 당연하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영양 공급관과 인공호흡 장치는 특정한 외과 수술이 진행되는 동안이나 특정한 질병 때문에 필요한 것들입니다. 그러나 그런 기구를 사용하는 목적은 결국 그 사람이 스스로 먹을 수 있고, 호흡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은 죽어가는 사람의 경우와는 아주 다른 것입니다. 또한 의식이 있는 사람이나 잠재적으로 의식을 회복할 수 있는 사람은 이 결정을 스스로 내릴 수 있어야만 합니다.
또한 인생의 대부분이나 전부를 영양 공급관에 의지해야 하지만 다른 모든 면에서는 행복하고 정상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려는 노력을 게을리 할 이유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소그룹 지도자 여러분!
세상은 빨리 변해가고 있습니다. 그에 따라 여러 가지 윤리적인 이슈들이 부각되고 있습니다. 만약, 소그룹 지도자된 우리가 동성애, 포르노그라피, 이혼, 환경문제, 낙태, 체세포 복제, 줄기세포 연구, 사형폐지론, 전쟁, 중독...에 대해 성경적 기준을 적립해둔다면, 소그룹 구성원들을 이끌어갈 때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오늘 이 시대의 윤리적 이슈에 대해서도 말씀하십니다. 말씀의 원리로 무장하고, 윤리적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 소그룹 지도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기독교 윤리로 세상을 읽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마주치는 문제는 단순히 Yes/No로만 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일이 성경을 뒤지기도 힘들다. 성경에는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원칙의 큰 틀만 제시하고 있을 뿐, 세세한 사례에 관한 행동원칙이 모두 수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바로 그것이 우리가 ‘기독교 윤리관’을 확고하게 정립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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