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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TV에서 방영되고 있는 드라마들 중에 전처와 후처 사이에서 기억상실증에 걸린 한 남자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드라마가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 이 드라마가 가지고 있는 진부한 소재로 인해 아직 만족스러운 시청률을 올리지 못하자 연출진은 극단의 처방을 내어놓았습니다. 소위 ‘막장 드라마’의 면모답게 삼각관계를 넘어 오각관계의 얽히고설킨 내용을 설정한 것입니다. 공공성과 공익성을 추구해야 하는 방송사들이 그에는 전혀 관심 없는 듯 선정적 주제들과 기존의 사회적 혹은 도덕적 용납을 벗어나는 주제들에 더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10년 전만하더라도 이복남매의 ‘기구한 사랑’만으로도 충분히 눈시울을 뜨겁게 만들었을 내용들이 지금은 그저 진부한 소재로 여겨질 뿐입니다. 출생의 비밀과 함께 시작되는 사랑의 진통, 아름다운 불륜을 주장하는 아내의 불장난, 더욱 현란하고 강력한 음란성 광고와 폭력성 등에 사람들은 더 관심을 보이고 있고, 이를 지지하는 네티즌들은 뻔한 소재에 반기를 들며 좀 더 강렬한 스토리에 숨은 찬사를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점점 더 강한 말초적 자극을 원하는 사회! 이런 우리 사회의 흐름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역치(threshold value) 상승의 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역치’란 신경과학이나 생리학 분야에서 사용되는 말로서 ‘일정한 반응을 이끌어내는 데 필요한 소자극량’입니다. 우리 사회의 역치가 높아진다는 말은, 우리가 뭔가를 보고, 듣고, 느꼈을 때, 마음속에 기쁨·슬픔·노여움 같은 정서가 생겨나려면 좀 더 강한 자극이 필요하다는 의미입니다.
일정한 즐거움과 쾌락에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더 이상 같은 깊이의 즐거움과 쾌락을 느끼지 못합니다. 즐거움을 주던 예전의 것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말 그대로 식상해져 버리는 것입니다. 자연스럽게 더욱더 큰 즐거움과 깊은 쾌락을 찾으려 하는 인간의 본성으로 인해 시청자들이 원한다는 이유를 내세워 방송사들은 전혀 윤리적 검토를 거치지 않고서 조금씩 도덕적 틀을 자연스럽게 벗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의 윤리수위 기준이 바닥을 치듯 흔들리고 있는 것은 비단 이런 문제에서뿐만이 아닙니다. 이성을 넘어서 참사랑의 의미를 감각적으로 왜곡해 버린 동성애, 매춘적 쾌락과 육욕을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한 포르노그래피, 잠깐의 향락에 삶을 몰락시켜 버린 각종 중독, 온전치 못한 사회에 대한 정당한 도피를 주장하는 자살, 생명체를 산모의 신체조직 정도로 여기는 낙태, 편안하게 죽을 권리를 넘어 의료행위의 한 부분으로 치닫는 안락사 등 수많은 문제들에 있어서 우리 사회는 뚜렷한 방향감이 없이 조금씩 판단불능이 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세상을 향하여 우리가 던질 수 있는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기독교 윤리에 대한 접근 방식은 각 교단의 입장에 따라 약간씩 다를 수 있지만, 성경에 입각한 그 본질적인 목소리는 동일합니다. 이 본질에 대하여 최근 노만 가이슬러 박사는 “Love Your Neighbor: Thinking Wisely about Right and Wrong (역, 『기독교 윤리로 세상을 읽다』, 국제제자훈련원)”라는 책을 통하여 앞에서 언급한 윤리적 문제들에 대한 기독교의 입장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명확하고도 체계적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는 이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세속적 인본주의의 ‘삶의 질’ 개념은...생명의 존엄성 개념과 대조된다. 이 개념은 도덕적 선택을 할 때 가장 중요한 요인이 생활의 질이라는 생각에 기초한다. 예를 들어, 한 여인은 자신의 삶의 질 혹은 태어나지 않은 아이가 갖게 될 삶의 질을 고려하여 낙태 유무를 판단한다. 세속적인 인본주의자들은 아이가 나쁜 가정환경 속에 태어날 가능성이 있을 경우 때때로 낙태는 정당하다고 말한다. 그 아이가 나쁜 삶의 질을 누리는 것보다는 태어나지 않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이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는가? 이 질문에 성경적 유신론자는 ‘아니오’라고 대답하고, 세속적 인본주의자는 ‘예’라고 대답한다. 인본주의자는 다른 사람의 삶의 질을 개선하거나 다른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는 소수의 생명을 파괴하는 것은 정당한 일이라고 말한다. 반면, 유신론자는 가능하면 생사의 문제를 하나님께 맡긴다...
세속적 인본주의와 성경적 유신론이라는 두 세계관은 서로 현저하게 대립한다. 이 두 가지 세계관은 특정 철학적·윤리적 쟁점에서 자주 대립하는데, 서로 다른 관점에서 출발해 다른 결론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관점을 점검하거나, 자신이 삶 속에서 내리는 결정에 그 관점이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고려하지 않는다...” (제8장 “쟁점들에 직면하라” 중에서) | 위의 마지막 문장을 묵상하며 한국의 기독교를 들여다보노라면, 마치 잔잔하고 평온한 바다에서 낚시꾼이 고기 한 마리도 낚지 못했을 때 느꼈을 허전함을 느끼게 됩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흐름에 당당히 맞서 말씀에 입각한 기독교 진리를 생동감 있게 전하던 열심을 상실한 채, 혼란스러움을 탈피하여 침묵의 평온을 즐기는 늙은 낚시꾼으로 전락해 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저 바람 한 점 없는 잔잔한 바다에 돛단배 하나 띄워놓은 것 같은 그런 풍경 말입니다. 거기에는 세상을 향한 냉혹한 비판과 강렬한 주장도 없고 뱀 같은 지혜를 던지는 그런 성실함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미국에서는 앞에서 말한 낙태, 포르노그래피, 안락사 등의 문제에 대한 견해가 대통령 선거를 앞둔 후보들의 당선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 중요한 문제로 다루어지고 있는 반면, 세계에서 가장 열정적인 기독교인들이 살고 있는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문제에 대하여 심도 깊은 메시지를 던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지 않음이 참 이상한 일입니다.
이제 우리는 빠른 물살이 지나가는 갯바위에서 낚시를 즐기는 그런 기쁨을 찾아야 합니다. 평온해 보이는 시대흐름을 파고들어가 그 밑에서 흐르는 급박한 윤리문제를 꼼꼼히 들여다보는, 그리하여 이 시대를 보며 눈물을 흘리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꿰뚫어보는 수고를 아끼지 않는 리더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 모두가 이런 윤리적 노력에 대한 보답으로 수평선 저 멀리 떠오르는 시대의 밝은 태양을 함께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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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윤리로 세상을 읽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마주치는 문제는 단순히 Yes/No로만 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일이 성경을 뒤지기도 힘들다. 성경에는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원칙의 큰 틀만 제시하고 있을 뿐, 세세한 사례에 관한 행동원칙이 모두 수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바로 그것이 우리가 ‘기독교 윤리관’을 확고하게 정립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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