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바울은 예수님으로 인해 삶이 완전히 바뀐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얼굴을 대면하여 만난 그는 성령 가운데 거하며 주님을 위해 선교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이 이 모든 일을 했다는 인상을 주기보다는 상처받기 쉬운 모습에 대한 본보기만을 제공합니다. 로마서 7장에 보면 그의 이런 모습이 잘 나타나있습니다. 지미 카터 대통령은 1976년에 “내 마음 속에는 정욕이 있다.”고 고백하여 세상을 놀라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이 놀라운 고백도 바울의 고백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는 자기 몸 구석구석에서 솟구쳐 오르는, 자신과의 격렬한 싸움에 대해 고백하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이 싸움에서 져, 하고 싶은 일은 하지 못하고 해서는 안 되는 일은 하고 마는 딜레마에 빠진다는 것도 고백합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너무나 많은 일을 한 사람이 자기는 아직도 불완전하며, 범죄 하기 쉬운 나약한 인간임을 공개적으로 선포하는 장면을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이 놀라운 고백은 우리가 읽는 성경에 일관되게 반복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에게서 불완전함을 제거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칭송 받은 다윗도 남의 아내를 범한 비겁하고 부끄러운 기록을 성경에 상세하게 남겼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이 내키지 않아, 니느웨로 가기 싫다고 고집스럽게 버텼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아무리 착하게 보이려 애써도, 결국 죄인이며 죄와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폭로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열어 보이는 것이 왜 힘들까?
일반적으로, 자신을 열어 보여서 겪는 고통보다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탄로 나지 않게 꽁꽁 가둠으로 겪는 고통이 훨씬 더 큽니다. 우리에게 어떤 힘든 일이 있는지 아무도 모르게 하고 교회 다니는 것보다, 차라리 교회 게시판에 우리 문제를 털어놓아 모든 성도가 우리 문제를 알게 하는 게 훨씬 낫습니다. 그런데 자신을 드러내지 못하는 이유는 뭘까요? 그리고 그렇게 하는 사람이 소수에 지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리스도인이 자기를 열어 보이지 못하는 이유는 아마도 자신이 완벽하지 못하며, 자기 이미지가 실제 자신의 모습과 다르다는 것이 드러나는 순간, 사람들로부터 배척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그 가운데는 자신과 동일한 문제로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을 수도 있습니다. 야고보서 5장 16절은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서로 자기 죄를 고백하지 않는다면, 상대방을 위해 무슨 기도를 해야 할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상처 받기를 거부하면, 치유할 수 있는 기회뿐 아니라 성장하고 강해질 수 있는 기회마저 잃어버리게 됩니다. 진정 건강해지기 원한다면, 자만심을 극복하고 자기가 어떤 삶을 살고 있으며, 영적으로나 감정적으로 어떤 상태에 있는지 알려야 합니다. 자신을 열어 보여 상처 받기 쉬운 자가 되면, 다른 사람들과의 연결고리가 형성되며 한 교회, 나아가 한 국가에 부흥의 불길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영적 위대함과 종교적 파멸의 차이는 자기 죄를 인정하고 상처 받기 쉬운 자가 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완벽주의라는 함정
상처 받기 싫어하는 사람들은 대개 완벽주의자가 되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자신을 많이 아프게 합니다. 그들의 우선순위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실패와 비웃음, 비난을 피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완벽한 사람이 되면, 누구도 자신이나 자기 행동에서 허점을 발견할 수 없을 것이며, 그렇게 되면 용납과 사랑과 소속감을 얻게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참으로 비이성적인 사고가 아닐 수 없습니다. 기준이 너무 높다 보니, 거기에 부합하려고 애쓰는 과정에서 중독적인 신앙 시스템 속으로 더 깊이 빠져 들게 됩니다. 그러나 완벽은 이생에서는 누구도 도달할 수 없는 덕목입니다. 인간은 유한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완벽주의는 우리가 유한한 존재임을 부인합니다. 게다가 너무나 성과지향적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그 관계의 결과물인 ‘용납될 만한 행동’보다 덜 중요하게 여깁니다. 반면, 건강한 믿음은 과정지향적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결코 온전해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목표로 삼을 수는 있습니다. 역량이 부족하다는 것은 우리 스스로는 온전해질 수 없으며, 우리에게는 구원자 되시는 하나님이 필요하다는 것을 확증합니다. 건강한 시스템 하에서는 용납은 사랑을 바탕으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래서 우리 행위와 상관없이, 그 사실 하나 때문에 우리를 용납하십니다. 건강한 시스템 하에서는 모든 성도가 있는 모습 그대로 용납됩니다. 그들이 무엇을 했든 하지 않았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 용납이 있기에, 우리는 완벽주의와 수치라는 굴레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성경은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을 끊임없이 반복합니다. ‘용기를 내라’는 이 말씀은 인간이 전적으로 상처 받기 쉬운 존재라는 선언으로 더욱더 힘 있는 말씀이 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누구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비밀이 아무리 작다 해도, 언제까지나 베일에 가려져 있을 수는 없습니다(마 10:26-28). 그렇게 가려진 채 우리를 해치는 역할을 계속할 수는 없습니다. 때가 되면 모든 것은 환히 드러나고 밝혀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상처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기회가 왔을 때 그 사실을 인정하는게 어떻겠습니까?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을 믿는다면, 얼마든지 자신을 열어 보임으로써 상처 받기 쉬운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한다는 것은 실제적이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신을 있는 모습 그대로 보여 줌으로써 거절당할 수도 있는 위험을 무릅쓸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다면, 우리는 실제적으로 되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믿음이 강할수록, 더욱더 실제적인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동기를 부여 받게 됩니다. 하나님께 용납되는 것은 사람들에게 용납되는 것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크고 중요한 일입니다. 자신이 하나님께 용납되었다는 것을 알면, 사람들에게 거절당하는 것쯤이야 담담하게 직면할 수 있습니다. 건강한 믿음은 우리를 자유롭게 하며, 자신의 불완전한 자아를 다른 사람과 나눌 수 있게 합니다. 에베소서 6장 16절은 믿음을 방패로 사용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 말씀대로라면, 우리는 요란하게 꾸민 겉모습 뒤에 자신을 숨길 필요가 없습니다. 믿음의 방패를 견고히 들고 서 있으면,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열어 보임으로써 상처 받을 자세를 취하는게 그리 어렵지 않기 때문입니다. |
소그룹 지도자 여러분! 어떤 사람이 믿음이 참된지 아닌지 알아보고 싶다면, 그가 세상으로부터 거절당할 위험을 얼마나 기꺼이 무릅쓰려고 하는지 살펴보면 됩니다. 그것이 신실함의 여부를 가늠하는 표지이기 때문입니다. 건강한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고통, 실패, 죄, 감정적 약점 등을 시인할 수 있습니다. 자기가 항상 세상 맨 윗자리에 있는 척할 필요도 없습니다. 자기만큼 완벽하고 유능한 사람도 없음을 보여 주려 할 필요도 없습니다. 잘못했을 때는 언제든 잘못을 시인하고, 도움이 필요할 때는 언제든 도움을 청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철저히 하나님의 통제 하에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가 실제적이 된다고 해서 잃어버릴 것은 우리 자만심 말고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오히려 좋은 일입니다.
※ 이 글은 사랑플러스의 신간 “더 예수처럼, 덜 종교적인”(스티븐 아터번/ 잭 펠튼 지음)의 8장을 요약 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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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예수처럼, 덜 종교적인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을 되돌아보게 하고, 오늘날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갖고 있는 믿음의 근본을 되짚어 문제를 들여다 볼 수 있도록 한다. 무엇보다도 더 예수처럼 사는 것만이 진정한 믿음과 영향력임을 일깨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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