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에 열린 제 12차 교갱협 영성수련회에서 옥한흠 목사는 “가라지가 섞인 교회”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했습니다. 이번 호에서는 이를 중심으로 오늘날 지상교회가 직면한 현실과 이를 극복하기 위해 주님이 가르쳐 준 방법은 무엇인지에 대해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집 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하되 주여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런데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주인이 이르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주인이 이르되 가만 두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둘 다 추수할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_ 마태복음 13장 24~30절
본문에서 예수님은 천국은, 달리 이야기 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조금 폭을 좁혀 이야기 하면, 이는 지상교회의 모습을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이 비유를 통해 예수님께서 지상교회를 섬기고 있는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첫째, 우리는 지상교회가 완전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원래 교회 공동체는 좋은 씨앗들의 모임, 즉 천국의 아들들이 모인 공동체입니다. 하지만 이 영광스러운 공동체에도 원수가 심어 놓은 씨앗들이, 즉 마귀의 자식들이 섞여 있다고 본문은 말합니다. 하나님의 교회이지만 어둠의 권세가 활동하는 이 세상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이는 교회가 피할 수 없는 숙명입니다. 이 사실을 분명히 인식할 때 우리는 완전무결한 교회를 비전으로 삼는 잘못에 빠지지 않게 됩니다. 성경은 결코 지상교회가 완전하거나 무결하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교회 역사를 돌아보더라도 완전무결한 교회를 꿈꾸었던 운동은 한시적이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오히려 이를 목표로 한 교회들 안에는 사랑이 식어버리고, 옳고 그름만을 강조하는 율법주의가 자리잡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또한 지상교회가 완전할 수 없다는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교만에 빠지지 않게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공한 목회자라고 아무리 칭송해도 그 말에 우리의 마음을 빼앗기지 않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지상 교회는 언제든지 부패할 수 있고, 부패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특히 목회자인 우리는 물론, 교회의 지도자들 중에도 가라지가 있을 수 있고, 이럴 경우 하나님의 교회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은 너무나 큽니다. 이를 인정할때 우리는 겸손해 질 수 있습니다.
둘째, 지상교회는 끊임없이 갱신되어야 하는 숙명을 갖고 있습니다.
오스 기니스는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 그리고 그리스도교(기독교)라는 세 단어를 비교하면서, 그리스도가 그리스도인으로,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교로 넘어가면서 생명력을 잃어가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즉 인격적인 것에서 시작해서 점점 비인격적인 것으로 변질되어 간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오늘날 많은 젊은이들이 그리스도에게는 매력을 느끼지만 그리스도인이나 교회에 대해서는 거부감을 갖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런 하향적 변화는 죄가 항존하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지상교회로서는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결코 오래 가지는 못합니다. 영적 부흥도 마찬가지고, 개혁도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종교개혁자들이 말을 빌리면, “지상교회는 항상 개혁하는 교회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지상교회는 끊임없이 갱신해야 할 숙명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지도자로서 우리 역시 끊임없는 갱신의 작업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합니다.
셋째, 끊임없이 갱신하기 위해서는 사람을 세우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어떻게 하면 지상교회는 끊임없이 갱신할 수 있을까요? 분명 가라지를 지상교회에서 모두 없앨 수는 없습니다. 또한 가라지를 알곡으로 바꿀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가라지 보다 알곡이 더 잘 자랄 수 있는 토양을 만들 수는 있습니다. 이러한 토양을 만드는 데는 제자훈련만큼 좋은 방법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C. S. 루이스는 순전한 기독교에서 “교회는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이끌어 작은 그리스도를 만들기 위해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교회 존재의 목적이라고 단언합니다. 오늘날 루이스만큼 영향력 있는 학자요 문학가요 변증가는 흔치 않습니다. 그런 그가 “만약 교회가 이 일을 하지 않는다면 교역자도, 설교도, 예배도, 심지어 선교도 시간낭비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작은 그리스도를 만드는데 왜 훈련이라는 것이 필요합니까? 달라스 윌라드는 “세상에서 중요한 일치고 훈련 없이 되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영적인 삶도 훈련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다시 말해 훈련 없이는 삶의 만족감과 질, 품위를 전혀 얻을 수 없다. 교회 안에 발생하는 거의 모든 불상사는 훈련이 없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설교를 통해 성도들에게 감동을 줄 수도 있고 위로를 줄 수도 있습니다. 또한 한 두 가지 진리를 깨닫게 만들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삶을 변화시키지는 못합니다. 주님 역시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바를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훈련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여러분의 교회가 하나님의 사람들이 왕성하게 활동하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교회가 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훈련을 통해 사람을 세워가시기를 바랍니다.
넷째, 교회에 대한 낙관적인 시각을 가져야 합니다.
가라지를 발견한 하인들은 가라지를 뽑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마지막 때까지 기다리라고 태연하게 말합니다. 가라지가 있다는 사실 때문에 예수님은 비관하거나 낙망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교회의 미래에 대해 낙관적으로 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교회가 가진 영광을, 교회는 반드시 승리하리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피로 사신 값진 교회가 결국에는 온 우주를 충만하게 될 날을 내다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역시 가라지의 존재를 보고 비관하지 말아야 합니다. 목회자는 교회를 낙관적으로 보는 눈을 가져야 합니다. 아무리 교회가 문제가 많아도 아무리 힘들어도 아무리 어둠의 자식들이 공격해도 우리는 주님의 이름으로 승리할 것을 확신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라지 비유를 통해 주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비관주의자 패배주의자는 교회를 갱신할 수 없습니다.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교회는 결코 패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생명력이 있습니다. 따라서 어떠한 상황에서도 자라가게 되어 있습니다. 처방은 간단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 목회의 본질과 원칙만을 따라야 합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제자훈련입니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똑 같이 흐릅니다. 그냥 하던 대로 쉽게 목회하는 사람에게도 시간은 금방 지나가고, 제자훈련에 목숨을 걸고 일하는 사람도 금방 지나갑니다. 무엇을 하면 지금 이 순간을 보내시겠습니까? 주님이 가르쳐준 목회의 본질을 붙잡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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