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 최초로 열리는 야구 월드컵(World Baseball Classic)의 지역 예선에서 대한민국 팀이 아시아 최강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마지막 일본과의 경기는 한편의 드라마처럼 마지막 부분에서 역전을 이루어냈습니다. 공교롭게도 30년 동안은 결코 이길 수 없을 것이라고 큰 소리쳤던 그 일본인 선수가 마지막 타석에 들어섰습니다. 아주 평범한 내야 타구로 물러나면서 경기가 끝이 났습니다. 열심히 수고한 선수들과 함께 전체 팀을 이끈 노장 김인식 감독을 다시금 바라보게 됩니다. 객관적인 전력에서는 분명 차이가 있는 경기였습니다. 하지만 승리는 이번처럼 늘 계량 가능한 물리적인 조건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정신력이나 리더십과 같은 쉽게 수치로는 환산되지 않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최근 ‘김인식 리더십’이란 책이 출간될 만큼 김 감독의 리더십은 이 시대의 화두가 되어 있습니다. 그의 리더십이 이처럼 집중적인 조명을 받게 된 것은 물론 그동안 지속적으로 보여 왔던 그의 일관된 모습 때문이겠지만, 특별히 지난 해 그가 보여준 리더십 때문입니다. 이번 호에서는 바로 주목받고 있는 김 감독의 리더십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자연스런 충성심을 이끌어내는 리더십
김인식 감독은 말 한마디의 위력을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소외된 선수들에게 용기를 북돋워주고 좌절을 맛본 선수들을 향해서는 자신감을 안겨 주려고 세심한 배려를 아끼지 않는 그런 지도자입니다. 그가 두산 베어스의 감독으로 있을 때의 일입니다. 김동주는 고질적인 손목부상에 시달리는 선수입니다. 대꼬챙이로 찌르는 듯한 손목통증이 엄습하면 그는 어쩔 수 없이 감독을 찾아옵니다. “오늘 경기는 쉬고 싶은데요.” 김동주의 요청에 대해 김 감독은 “그래 알아서 쉬어라.”라는 딱 한마디 말만 할 뿐입니다. 다른 감독 같았으면 어림없는 소리입니다. “네가 지금 쉴 때냐.”라는 위협형에서부터 “어떻게 안 되겠느냐.”는 읍소형, 그리고 “정 그러면 한 타석이라도 안 될까.”라는 타협형까지, 적어도 김 감독처럼 선수의 요청을 그대로 받아들여주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막상 경기가 시작되면 예상 밖의 사태가 벌어집니다. 결장 요청은 김동주가 했지만 정작 게임이 시작되면 가장 갑갑해하는 사람이 김동주가 되는 묘한 상황이 벌어집니다. 경기가 팽팽하게 돌아가면 언제 아팠냐는 듯 김동주가 방망이를 들고 연습스윙을 하는 등 의욕을 내비칩니다. 이윽고 경기 후반 황금찬스에선 자신이 결장을 요청했다는 사실도 망각한 채 감독 앞으로 달려가 통사정을 합니다. “감독님 제가 한번 대타로 나갈 테니, 믿고 기용해 주십시오.” 이런 일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충성심은 이렇게 자연스럽게 샘솟아야 합니다. 결코 강압적인 분위기나 외형적인 체계나 틀에 의해서 만들어져서는 안 됩니다. 자연스럽게 솟아나는 충성심이어야 자발적인 순종으로 이어집니다.
멍석을 깔아주는 리더십
2005년 시즌 김 감독이 맡았던 한화는 시즌 전 약팀으로 분류되었습니다. 그러나 보기 좋게 예상을 깼습니다. 그 과정에서 '한물갔다'고 여겼던 선수들이 분발했습니다. 타선에선 초반 김인철이 돌풍을 일으켰습니다. 기억에도 가물거렸던 만 서른여섯의 지연규는 대뜸 마무리투수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에이스 문동환은 6년 만에 10승 투수로 돌아왔습니다. 시즌 후반 조성민이 승리투수가 됐을 때는 모두가 놀랐습니다. 정규 시즌을 마치고 이어진 플레이오프에서도 김 감독의 리더십이 빛을 발했습니다. 준 플레이오프 3차전 승리투수 최영필은, 2002년부터 3년 동안 1승(6패)밖에 올리지 못했던 선수였습니다. 그런데 준 플레이오프에서 가장 중요하다는 3차전에 등판, 7이닝을 넘게 던지면서 승리투수가 되리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경기가 끝난 뒤 누군가가 물었습니다. “올해 무엇이 달라졌기에 정규시즌(8승)에서도, 포스트시즌에서도 갑자기 잘하는 겁니까?” 최영필은 잠시 뜸을 들였습니다. 그러더니 무겁게 입을 열었습니다. "사실 전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지금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늘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고, 자리가 없었습니다. 올해 달라졌다면 그 부분입니다. 올해는 자리가 있고, 기회가 주어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김 감독의 '멍석' 리더십입니다. “야구는 선수들이 한다.”는 말은 야구계의 금언(金言)입니다. 감독이 아무리 뛰어나고, 수읽기가 탁월해도 직접 야구를 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감독의 가장 큰 역할은 선수들이 마음껏 기량을 펼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 주는 것입니다. 제대로 된 멍석을, 제대로 된 선수에게 깔아주는 게 바람직한 리더십입니다. 리더는 이끄는 사람입니다. 모든 것을 혼자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리더는 자신을 따르는 이들을 믿고 그들이 제대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고 기회를 주는 사람입니다.
믿고 기다리는 리더십
그런데 김 감독에게는 ‘재활공장 공장장’이라는 별명이 붙어 있습니다. 한물간 선수들을 다시 그라운드에 서게 하는 데 있어 그에게는 탁월한 능력이 있습니다. 부상, 가정불화, 모난 성격 등으로 야구를 접었던 선수들이 그의 지도하에 다시 그라운드로 돌아온 사례가 부지기수입니다. 앞서 예를 들었듯이 30대 중반의 나이로 은퇴를 고려했던 지연규는 마무리 투수로서 훌륭한 성적을 냈습니다. 가정불화와 부상으로 야구판을 떠났던 조성민도 불펜투수로 거듭났습니다. 당연히 재활의 특별한 노하우에 대해 의문이 듭니다. 세간의 질문에 김 감독은 '별거 없어, 지네들이 다 알아서 잘해'라며 다소 김빠진 대답을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김 감독에게는 특별한 재활방식이 없습니다. 굳이 언급하면 '신뢰'와 '믿음'이 그만의 노하우입니다. 그 신뢰 덕에 선수들이 자신이 가진 기량을 뛰어 넘는 활약을 펼치는 것입니다. 대한민국 축구를 재부흥시킨 딕 아드보카트 국가대표 감독도 경기 중 벤치로 돌아오는 선수들 개개인에게 격력하며 악수를 합니다. 그가 가진 카리스마뿐만 아니라 신뢰로 선수단을 이끌고 있는 것입니다.
리더십에 관한 특강이나 서적 등 성공을 이끌어내는 리더십에 관한 담론이 참으로 풍성합니다. 화술기법이나 지시 방식, 부하 평가 방식 등 나름의 기술이 전수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신뢰’가 없다면 그 모든 기술이 무용지물이 되고 말 것입니다. 지혜로운 리더라면, 자연스럽게 충성심을 이끌어낼 수 있어야 합니다. 따르는 이들이 스스로 자신을 믿고 자신의 역할을 수행해 갈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리더와 따르는 이들 사이의 신뢰가 중요합니다. 신뢰를 바탕으로 한 지혜로운 리더십을 갖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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