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십] 391호 - 공동체를 세우라는 부르심

목록보기 조회수 5139

현대 문화는 공동체를 대적하면서도, 그에 대한 열망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공동체에 관한 언급을 멈추지 않습니다. 현대 문화는 강렬하게 공동체를 원하고 있습니다. 친밀함을 증진시키는 법을 배울 수 있는 기초적인 사회 조직이 없고, 그럴 기술이나 시간도 없기 때문에 우리는 진정한 친밀함을 갈망합니다.

요즘 사람들이 성적인 부분에 그토록 집착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들이 사회적인 친밀함에 목말라 있지만 그것을 만들어내는 법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덧붙여, 대중 매체는 친밀함을 형성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누군가와 침대에 함께 눕는 것이라는 메시지를 하루에 95번 이상 내보냅니다.

이처럼 세상 문화는 다양한 종류의 사랑을 알지 못하므로, 신앙 공동체가 진정한 사랑의 모임이 되게 하려면 지속적인 훈련이 필요합니다. 순수하고 정결한 친밀함은 신중하고 부단한 연습을 요구합니다. 교회라는 이름만 가지고 있다고 해서 우리가 진정한 공동체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여러 교회를 다녀보았지만, 진정한 크리스천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 진지하게 헌신하는 교회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었습니다. 내가 말하려는 요점은 공동체 생활의 기술은 더 이상 현대 사회로부터 배울 수 없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교회가 되고, 세상 사람들이 필사적으로 받고 싶어하는 깊은 친밀함과 너그러운 포용의 마음을 기르고자 한다면, 다양한 교육과 성화와 희생과 고통이 뒤따라야 할 것입니다.

성경을 복수형으로 읽으라

크리스천들에게 참된 공동체에 대하여 가르치는 첫 번째 단계는 성경의 많은 부분이 복수형으로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그러한 복수성에 따라 행동하도록 준비시켜야 합니다. 예를 들어, 빌립보서 4장 4절 말씀은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사실 이 구절은 좀더 정확히 옮기면, “너희 모두는 계속해서 기뻐하라”라는 말씀입니다. 성경의 세계 속에서 살아간다는 말은 ‘너(단수)’가 아니라 ‘너희 모두(복수)’로 살아가는 것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성경 속에서 개인적으로 주어진 교훈은 디모데, 디도, 빌레몬에게 주어진 것뿐입니다. 이 세 사람은 공동체의 일원이 아닌 개인 자격으로 편지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교회 구성원들이 성경을 이런 방식으로 읽으려면 강한 훈련이 밑받침되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라는 개념을 방해하는 서구 사회의 개인화된 어휘를 변화시키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각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와 개인적인 관계를 유지해야 하며 우리가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것이라는 사실이 기본적이고 근본적인 진리임을 부인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믿음에 관한 ‘개인적인’ 강조가 너무 지나쳐서 우리 모두, 그리고 우리의 믿음이 크리스천 공동체 속에서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을 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우리가 자신을 개인적인 관점에서 생각하기를 그치고, 믿음 안에서는 모든 일이 공동으로 협력하는 가운데 이루어져야한다는 것을 인식한다면, 힘든 인생과 고통과 수고를 견디기가 훨씬 수월해질 것입니다.

크리스천 공동체가 대안사회다

우리는 세상의 방법을 거부하고 우리가 제시하는 선물이 세상에 필요한 것임을 인식하기 위해 대안을 선택해야 합니다. 다른 한편 우리는 자신을 대안에 가까운 존재일 수밖에 없음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 속에서 증인으로 살아가기에 충분한 거리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유사’라는 단어를 통해 우리가 그 대안을 이 세상에서 결코 완성할 수 없다는 것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여전히 세상의 즐거움에 의해 유혹을 당하고 세상의 길을 따라 그릇된 방향으로 가기도 합니다.

그런 균형 상태는 여간해서 유지하기 힘듭니다. 거부하고, 호의를 베풀며, 증인으로 살아가면서도,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긴장 관계를 “세상 속에 있으나 세상의 사람이 아니다”라는 말로 설명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변 문화 속에서 어렵지 않게 거주할 수 있어서 금방 세상 속에 혼합되고 변화를 위한 행동을 전혀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세상은 기독교가 왜 중요한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또한 한편으로 우리는 극단적으로 다른 모습을 유지할 수 있어서 편협함에 빠져 이웃들과 단절된 상태로 살아갑니다.

복음으로 변화된 하나님의 사람들이 얼마나 뛰어난 대안들을 사회에 제시하고 있는지 잘 생각해보십시오. 더 이상 사회는 무기력한 성공 모델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믿는 자들이 고난받는 종의 모습을 보여주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생각해보십시오. 현대 문화는 큰 돈을 버는 사업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세상 속에 정의를 세우기 위해 자진해서 ‘가난’과 ‘수수함’을 보여주는 일이 얼마나 귀중한지 이미 알고 있습니다. 사회는 더 많은 폭력을 원하지 않습니다. 화해와 중재를 위해 헌신한 이들이 끼치는 감화력은 유난히 부각됩니다. 우리 이웃들은 더 이상의 거짓말을 원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은 진리를 찾아 헤매고 있습니다.

교회는 대응 문화의 일종으로, 주일 아침마다 매우 중요한 일을 위해 한자리에 모입니다. 세상 문화가 도저히 할 수 없는 일, 바로 예배입니다. 우리는 예배를 통해 세상으로 나가 이렇게 외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너희의 거짓말을 더 이상 믿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가 가진 진리의 선물을 전해줍니다. 세상이 진리를 갈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믿는자들이 세상에 주어야할 놀라운 선물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에 주는 선물인 신앙 공동체에 거하며, 그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전하고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진리의 노래를 다시 부르기 위해 ‘사랑 넘치는 공동체’로 돌아와야 합니다. 우리 이웃들을 위해 일상 생활에서 복음을 언제라도 드러낼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기 위해 공동체로 되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연합을 보존하라는 부르심

프린스턴의 뛰어난 기독교 사회학자였던 로버트 우드나우(Robert Wuthnow)는 미국내의 소그룹에 대한 연구에서 대부분의 그룹들이 정도 차이는 있지만 진정으로 다른 구성원들을 뒷받침해주지 않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모든 그룹들은 그저 편안한 장소 역할만 하고 아무런 반대 없이 감정을 나누는 수준에 머물렀습니다. 어떤 구성원이 그룹 내의 다른 사람에 의해 합당한 이유로 인해 비난받거나 충고를 받으면, 그는 ‘좀더 자신을 잘 받쳐주는’ 다른 모임을 찾아 떠났습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하나됨을 이룬다는 말은 구성원들이 한데 모여 온갖 즐거움을 만끽하며 서로 등을 두드려주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진정으로 하나가 되려면 평안의 매는 줄로 연결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평안은 거짓 신들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 속에 내재된 평안의 영은 기만과 거짓과 불일치를 물리친 대가로 주어집니다. 크리스천 공동체는 자신들의 하나 됨이 성경의 기준에 합치하는지 항상 측정해야 합니다. 온전한 성령의 줄로 묶여 있는지 점검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구성원들이 서로를 굳게 붙잡아주어야 하는 의무를 다하지 못하면, 공동체는 비성경적인 태도와 말, 또는 그러한 선택이나 행동 등으로 깨질 위험이 있습니다.

현대 문화의 주요 가치들을 버리지 않고 붙잡고 있으면, 공동체는 ‘교회 쇼핑객’들의 모임으로 전락하고 말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욕구를 최대한 충족시켜주는’ 교회를 찾아다니고, ‘좀더 앞선 음악들’을 사용해달라고 교회에 요구합니다. 공동체가 조금이라도 자신들을 속박하려 하면, 가장 편안하게 느낄 수 있는 다른 공동체로 떠나갑니다. 이런 모습이 “교회가 된다”는 말의 의미는 아닙니다.

제자도는 마케팅의 대상이 아니고 거래할 수 있는 물건도 아닙니다. 교회는 사람들의 욕구와 기분, 또는 기호에 맞춰 ‘종교적인 재화와 용역을 취급하는 판매업자’가 아닙니다. 교회는 하나님나라를 전하기 위해 ‘파송된 자들의 모임’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오랜 기간 동안 복음 전파를 위해 사역하고 역경이 닥쳐도 자기 자리를 떠나지 않을 선교사들을 길러내야 합니다.

갈등과 긴장, 혼란이나 문제가 일어나는 시기는 진정한 신앙 공동체가 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깨달을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입니다. 여기에 모든 일들을 철저히 성경적으로 이끌어나가는 데 온 힘을 쏟는다는 전제 조건이 붙습니다.

사랑하는 동역자 여러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는 한 몸의 지체를 이룰 수 있는 가능성을 부여받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부르심에 따라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위해 저마다의 사역을 감당하도록 성령을 통해 위임받았습니다. 그런 소명을 완수하면, 몸된 교회는 자라납니다.

※ 이 글은 “껍데기 목회자는 가라(좋은씨앗)” 제9장에 실린 마르바 던의 글을 발췌하여 정리한 것입니다.

껍데기 목회자는 가라

이 책은 풍부한 현장 경험자인 두 목회자를 통해 이 땅을 살아가는 목회자들이 재점검해 보아야 할 복음적 정체성과, 크리스천 리더로서의 자질에 대해 명확히 짚어주고 있다.

[자세히보기]


본문내용 내려받기.. ...




Tags : 리더십